*
[오늘 바빠요?]
[놀러올거면 안바빠]
[놀러갈거 아닌데요]
[아니어도 안바빠]
뭐래는거야. 로우는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용돈이 떨어져 하루종일 밥을 먹지 못해 온갖게 짜증난다. 키드에게 얻어먹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피차 비슷한 신세에 빌붙기도 미안해 결국 이쪽으로 발을 옮긴다. 혹시나 모른척할까봐 예전에 밥 사준다던 문자까지 보관해뒀다. 이제는 익숙한 공터에 발을 들인다.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닐텐데도 수풀이 우거져있는게 신기하다. 계단을 내려가 드레스로사로 향한다. 가게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모네와 마주쳤다.
"어디가요?"
"오늘은 일찍 마치신대서요. 집에 가려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모네가 한번 웃어주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벌써 닫는다니. 혹시 저때문인가 생각하며 가게로 들어간다. 벌써 이 가게를 찾아 온 횟수가 열번 가까이 된다. 잘 챙긴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약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한달도 안되서 여섯번 정도를 들락날락거렸다. 결국 3-4일분의 약만 받아가는 조치가 취해졌다. 홀로 들어가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피가 보였다. 가만히 다가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리고 있는 모양과 비슷한 모양들이 여기저기에 그려져있었지만 다 엑스자 쳐져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건가. 엑스가 쳐져있지 않은 그림들을 보다가 특이한 문양이 보여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마음에 들어?"
도피가 고개를 들어 로우를 바라본다. 로우가 멋쩍은듯 고개를 끄덕인다. 팔에 해줄까. 이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귀여워. 도피는 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케치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또 약 잃어버린건가. 아니요. 그럼?
"배고파서요"
로우의 말에 도피가 웃는다. 점심 언제 먹었어. 안먹었어요. 아침은? 안먹었어요. 도피가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를 끼지않아 그의 놀란 표정이 드러난다. 용돈이 다 떨어져서요. 로우는 자기일이 아니라는듯한 말투로 대꾸하고는 도피의 스케치북을 뒤적거린다. 대부분이 문신에 대한 그림이었지만 드문드문 인체 드로잉이 보인다. 중간정도까지 보다가 익숙한 모양새의 그림이 보인다. 자신의 가슴께에 있는 문신. 그 뒤로 넘기자 침대에서 자고있는 자신이 그려져있다. 정성이 느껴져 느낌이 이상하다.
"가게는 왜 닫았어요"
"너 온대서. 잘 됐다 밖에서 먹자"
"그럴 필요없는데"
시큰둥한 로우를 잡아 일으킨다. 뭐 먹고싶어 꼬마. 빵은 싫어요. 고기 좋아해? 고기도 별로. 도피가 미간을 찡그린다. 가만히 그런 도피를 바라보는데 도피가 로우의 옷을 한번 훑는다. 바지가 좀 애매한데. 도피의 말에 이번에는 로우가 미간을 찡그린다. 저기 뒷문으로 나가면 차 있으니까 거기서 먼저 기다려. 그러더니 도피가 2층으로 올라간다. 흠. 로우는 도피가 가리킨 뒷문으로 향했다.
*
지금 로우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의 마당을 걷고있었다. 오늘 검은 자켓을 입고온 게 다행이었다. 후드같은 걸 입고왔으면 아주 민망해질뻔했다. 도피는 한정식집을 예약해뒀다. 부잣집 도련님. 그렇게 생각하며 로우는 도피의 뒤를 따라갔다. 건물의 안쪽에 다다라서야 로우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한정식 싫어하나?"
"아니요. 적당히 먹어요"
"술도 주문했는데 괜찮지?"
로우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금요일.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특별히 해야 할 과제나 참여해야하는 세미나가 있는지 확인해본다. 내일 히루루크 교수가 흥미있다면 들어보라했던 치의대 교수의 세미나가 있었다. 내가 왜 인간의 이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하지. 인상을 한번 쓰고는 세미나 일정을 삭제했다.
"괜찮아요"
"혈액 독소는 얼마만큼 줄어들었어?"
"모르겠는데요"
"차에 기계 있으니까 이따 재봐"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이 있는 방의 문이열리더니 제일 먼저 죽이 나온다. 오늘 첫 식사라 로우는 조금씩 천천히 죽을 떠먹는다. 도피는 음식에는 일체 손대지 않고 로우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고있었다. 로우가 도피를 바라보자 죽은 안 좋아해서 라고 시선에 답을 한다.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와"
"왜요?"
"좋아하는 사람이 밥 굶는건 마음이 아프다고"
로우가 작게 웃는다. 로우의 웃음에 도피 또한 웃는다. 죽을 거의 다 먹어갈쯤 메인요리들이 나온다. 그제서야 도피가 젓가락을 든다. 난 에피타이저로 배 채우는 바보같은 짓은 안해. 엄청난 식탐이네요. 엄청난 미식탐이라고 해줄래? 그거나 그거나. 달라. 도피가 회를 한 점 집어 먹는다. 로우가 도피의 모습을 보다가 도피가 먹은 것과 똑같은 회를 집어 먹는다. 계속해서 자기가 먹는 것들만 따라 먹는 로우를 눈치채고는 도피가 입꼬리를 올린다.
"왜 따라해"
"미식가라면서요. 그럼 맛있는것만 집어먹겠지"
도피가 크게 웃는다. 너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로우는 도피의 말에 신경쓰지않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인다. 뭐가 맛있을까요. 도피가 손가락으로 전이 담겨있는 접시를 가리킨다. 저거. 로우가 전을 집는다. 짚어주는대로 먹는게 귀여워 도피는 자신의 젓가락은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들을 로우에게 짚어주었다.
"이건 맛 없는데요"
"응 그건 맛없어"
도피의 장난에 로우가 인상을 쓴다. 그 때부터 로우는 도피가 무언가를 짚어줘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먹었다. 로우가 배불러서 젓가락을 내려놓자 도피가 그제서야 젓가락을 든다. 로우는 도피가 자신에게 짚어주지 않았던 요리들 몇개를 먹는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집어 먹으니 배가 부른 상태임에도 상당히 맛있다. 도피는 자신의 꼼수를 알아챈 로우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도피를 째려보며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낸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로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의 등받이에 기댄다. 후식으로 약과가 나온다. 그건 너 다 먹어. 그렇게 말하고는 도피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약과를 한입먹으니 평소에 먹던 약과와는 다른 맛이 난다. 도피가 놀란 로우의 표정을 보더니 웃는다. 여긴 직접 만들어, 엄청 맛있는데 사과의 의미로 너 다 주는거야. 로우는 약과를 먹으며 밥을 먹고 있는 도피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 안 불편해요?"
"익숙해서 괜찮아"
"왜 쓰는거에요?"
"남에게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이유는 묻지마, 그냥 싫은거야"
"근데 왜 나한테는 보여줘요?"
"좋아하니까. 본명도 똑같아"
로우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약과를 먹는다. 그렇게 로우는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차로 돌아갈쯤에서야 입을 연다.
"술 주문했다면서요"
"응 챙겼어. 집에가서 먹을거야"
"저는요?"
"우리집에서 자고 가"
로우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짜피 집에가면 내일 아침을 굶어야했기에.
*
저번에 뛰쳐나올때만해도 자세히 보지 못했던 집은 생각보다 넓었다. 혼자 살기에는 아주 많이. 거실의 부드러운 핑크색 털로 된 러그에 작은 상을 두고 앉았다. 로우가 러그를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느낌에 두 손으로 러그를 쓰다듬는다. 마음에 들지? 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피는 잔에 술을 따랐다. 그 가게에서 만든 특별한 술이라는 말에 로우가 조금 들뜬다. 도피가 건네는 잔을 받아 한모금 마셨다. 어때? 맛있어요. 많이 마셔. 언젠가처럼 로우는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웠다. 도피는 어느정도 술을 마시더니, 소파에 등을 기대고 켜져있는 티비를 시청했다. 로우는 도피가 뭘 하던 신경쓰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그러고보니 너 저번에 그거 술버릇인가?"
"뭐가요"
"엄청 섹시하게 들이대던거"
로우가 큰소리로 웃는다. 왜요, 그때 설렜어요? 도피가 짧게 웃는다. 당연하지. 로우는 어느새 비어버린 술병을 흔들었다. 도피 다 마셨어요. 도피가 티비에 시선을 떼 로우를 바라본다. 나른한 표정이 딱 그때같았다. 취했군. 도피는 일어나 상을 치웠다. 다시 자리에 앉자 로우가 도피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도피는 조금 걱정을 했다. 술버릇이 이래서야 다른 사람이랑 마신다고 하면 질투로 죽겠군. 티비에서 짐승의 먹이사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악어가 어린 영양을 이빨로 강하게 문다.
"그러고보니 도피"
"응"
"몇살이에요?"
"너보다 15살 많아"
로우가 벌떡 일어난다. 서른아홉살? 완전 아저씨. 도피가 허탈하게 웃는다. 아저씨가 들이대서 기분나쁘나? 로우가 고개를 젓는다. 난 연상이 좋아요. 술을 마시자 한없이 귀여워지는 모습에 도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로우가 가만히 도피를 보더니 도피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다. 꼬마 조금 수위가 쎄지는데. 도피의 말에도 아랑곳않고 로우가 도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동안이네. 많이 차이나도 6살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거 고맙네. 도피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다큐멘터리를 본다. 하이에나들이 사냥한 어린 물소의 배를 뜯어먹고 있었다. 로우가 도피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꼬마 곧 시험이지?"
"네. 과제도 곧 산더미로 쌓일걸요"
"우리집에 와서 공부해도 돼. 솔직히 너네집보다는 여기가 좋을거 아니야. 책도 너네집보다 훨씬 많고"
"그래도돼요?"
"응"
도피가 로우의 등을 쓸자 로우의 체중이 도피에게 쏠린다. 졸려요. 씻고 잠옷줄테니까 갈아입고 자. 로우가 몸을 일으킨다. 화장실은 저기. 로우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위험한 꼬마. 도피가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간다. 로우에게 맞을만한 잠옷을 찾는데 비쩍말라 키에 비해서 체구가 작은 로우에게 맞을만한 옷이 없다. 결국 그나마 작은 티셔츠를 꺼낸다. 아래는 도저히 맞을만한 옷이 없었다. 어느새 다 씻고 온 로우가 침대에 늘어지듯 눕는다.
"옷갈아입고 자"
"귀찮아요"
그러더니 이불에 깊게 고개를 파묻는다. 로우를 흔들어도 일으켜 앉혀도 도저히 깨지 않는다. 결국 도피가 로우의 옷을 벗긴다. 고문이 따로 없군.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힌다. 커다란 티셔츠가 가슴께를 훤히 보이게한다. 로우의 가슴에 있는 문신을 쓰다듬었다. 어떻게하면 잡아먹을 수 있을까. 도피는 티비에서 하고 있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도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옷갈아입힌 수고비정도는 받아야지. 도피가 고개를 숙여 로우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
로우는 잠결에 따뜻한 곳을 찾아 파고들었다. 차가운 피부에 온기가 닿는다. 본능적으로 뺨을 부비자 온기가 로우를 껴안는다. 한참 온기를 느끼다가 밝은 빛에 눈을 떴다. 잠에 취해 멍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살짝들자 눈을 감고 자고있는 도피가 보였다. 온기의 정체였나. 윗옷을 입고있지 않은 그의 몸이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몸에 따로 문신이 없다. 대신 자잘한 상처들이 몸의 곳곳에 박혀있었다. 로우는 그 상처들을 꾹꾹 눌러보다가 몸을 움직여 침대를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를 하는데 어제 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주 제대로 도피를 유혹했던 부끄러운 기억에 이마를 짚었다. 혹시 도피가 이성을 잃고 하지는 않았을까. 특별히 몸중에서 아픈곳은 없었지만 거울로 몸을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가 쇄골부분의 붉은자국을 발견한다. 이정도면 양반이군. 옷을 벗고 욕조의 물을 틀었다.
씻고 나오자 어느새 일어나 씻은건지 도피가 옷을 다 갖추어입고 거실에 있었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껴입고 거실에 그가 앉아있는 소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피가 읽고있던 책을 내려둔다.
"잠은 잘잤나"
"덕분에"
도피가 작게 웃더니 몸을 일으킨다. 아침먹고 집까지 태워줄께. 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은 간단하게 시리얼로 먹고 집을 나섰다. 차에 타자 도피가 네모난 기계를 건넨다. 독소 몇퍼센트인지 체크해봐. 기계의 뾰족한 부분에 손가락을 찔러 피를 흘려보낸다. 손을 떼어 도피가 주는 알콜솜으로 엄지를 닦는다. 21%. 거의 3주만에 10% 넘게 줄어들었다. 다음달 말이나 다다음달초면 곧 독소가 사라질 것이다. 도피는 생각보다 빨리 빠지는 독소에 머리를 굴렸다. 약을 받으러오지 않으면 만날 접점이 없어진다. 두달, 그 안에 승부를 봐야하는건가. 일이 조금 복잡해졌다.
"로우"
"네"
"존댓말 굳이 안 써도 돼"
"갑자기 왜요"
도피가 조금 고민하는듯 하더니 웃으며 입을 연다. 반말이 더 섹시해. 로우의 비웃음소리가 들린다. 별게 다 섹시하네. 로우의 대학 근처까지 오자 로우가 도피를 툭툭 친다. 여기서 내려줘, 들려야할 곳이 있어서. 로우는 금새 반말을 붙였다. 역시 반말이 섹시하다니까. 차에서 내린 로우가 허리를 숙여 도피에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조심히 들어가.
"다음에는 주말까지빼서 놀아줄께"
"그러던지"
로우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 캠퍼스로 들어간다. 도피도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는다. 잡아먹을 계획을 다시 짜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