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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가문은 뭐든지 잘해야한다. 지는 건 용납하지 않아'

햇빛이 방 안을 뒤덮은듯해 눈을 떴다. 간만의 주말인데 꿈이 엉망이다. 한참 본가에서 지내면서 아버지와 식사할 때의 꿈을 꿨다. 돌아가고 싶은걸까. 따가운 햇빛에 다시 눈을 깜빡인다. 집안에서 파문당한지 올해로 4년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코우키와의 관계가 집안에 들통났다. 집안의 반대에 반항하다가 파문을 당했다. 그 때는 별 생각없이 코우키와 함께라면 어떻든 상관없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집을 나왔다. 하지만 합격했던 대학을 돈이 없어 입학을 취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자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좌절하던 나를 보던 코우키는 자신이 대학에 가기 위해 모아두었던 저금을 털어 나를 대학에 보냈다. 남은 돈으로는 작은 원룸를 얻었다. 그리고 본인은 나를 먹여살리기 위해 대학까지 포기하고 벌써 수년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처음 1학년 1학기 동안은 코우키를 볼 수 없었다. 같은 집에 살고있었지만 하루에 세개의 알바를 뛰는 통에 내가 자고있을 때 들어와서 잠을 자고 내가 깨기 전에 나갔었다. 그런 코우키에게 미안해 악착같이 공부해서 수석자리를 따냈다. 당연히 장학금을 받았고 코우키의 알바 갯수를 하나 줄일 수 있었다.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바보같이 부잣집에서 살던 성격을 버리지 못해 코우키와 많이 다퉜다. 집안일도 하기 싫어했고, 코우키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심지어 목욕물 받는 것도 싫어해 코우키에게 받아달라며 거만을 떨었다. 그 성격을 버렸던 때는 월세를 내러 가달라는 걸 거절했을 때였다.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내가 을의 입장으로 돈을 건네는게 싫다고 말했다. 아마 그 때 코우키는 화를 냈다기보다는 울었던 것 같다. 우는 코우키를 달래면서 생채기가 가득한 그의 손을 보면서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게되었다. 농구를 하면서도 이만큼 거칠었던 적이 없던 손이었다.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인상이 쓰인다.

몸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자리에 코우키의 맨등이 보인다. 오늘 간만의 휴일인가보구나. 나는 날개죽지 부근에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로 나 있는 상처자국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작년 겨울이었나 일을 하다가 다쳤던 곳이다. 물건들이 떨어지면서 긁혔는데 꽤 무거웠던 물건들이라 상처가 꽤 깊었다. 그 때 코우키는 떨어지는 물건에 머리를 맞고 기절해 병원에 실려갔었다. 같이 일라는 사람에게서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 막 깨어난 코우키의 손을 붙잡고 내가 꼭 성공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울었다. 나중에 별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나는 이제 대학교 4학년이다. 이제 4학년 2학기를 보내고 있다. 취업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명문대학교에 한번도 수석을 놓친적이 없었다. 자신있다면 자신있었지만 코우키에게 책값에 대한 부담이 갈까봐 자격증같은 건 일체 준비하지 못했다. 남들이 말하는 스펙, 그게 부족했다. 특출난 건 몇백시간의 봉사활동정도뿐. 나는 꼭 대기업에 들어가야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게 사실이었다.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자신이 없다. 그 생각에 작게 실소한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었다. 당연히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 받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니까.

지금 내 삶의 행복은 코우키 덕분이었다. 문득 코우키가 내 곁을 떠나는 상황이 떠올랐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날 채워준 건 코우키였다. 코우키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또 세상에 벌거숭이로 던져질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집어삼킨다. 날 떠나면 안돼, 날 버리면 안돼. 견딜 수 없는 한기가 느껴져 코우키의 등을 끌어안았다.



"코우키, 코우키, 코우키, 코우키, 코우키.. 떠나면 안돼, 날 버리면 안돼. 계속 내 곁에 있어"
"...응? 무슨일이야 세이?"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가 들린다. 코우키의 목소리에 축축한 감정이 울컥하고 솟아오른다. '사랑해, 사랑해 코우키. 내 모든걸 다 바쳐서 널 사랑해' 젖은 목소리로 응석 부리듯 코우키를 끌어안는다. 등을 돌리고 있던 코우키가 몸을 돌려 마주본다. 다정한 너의 표정이 날 안심시킨다. 나는 너밖에 없어, 너 뿐이야.



"이리와, 이럴땐 너가 아니라 내가 널 끌어안아야 되는거야"



그렇게 말하며 코우키는 따스하게 날 안아준다. 나보다 작은 이의 품에 안겨 뺨을 부비자 웃음소리가 들린다. '오늘따라 어리광 부리네'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줘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코우키의 손이 느릿하게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같은 바디워시를 쓰는데도 코우키에게 나는 냄새는 좀 더 푸근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이제야 그 소름끼치던 공포가 가시는 것 같아 안심한다. 아아 코우키, 정말-



"나는 너밖에 없어"
"나도. 내 모든걸 다 받쳤잖아. 나도 세이밖에 없어"



그의 말에 나는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닫는다. 맨몸인 날 채워주기 위해 코우키는 자신의 모든것을 나에게 받쳤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안돼. 나는 네가, 너는 내가 필요해. 고개를 들어 호선을 그리고있는 입술에 입을 맞추자 코우키가 푸스스 웃는다. '아침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거, 기분좋네'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춘다. 뺨, 눈꼬리, 콧등, 귓바퀴, 이마, 머리카락, 아랫턱, 목덜미, 쇄골. 퍼부어지는 키스가 간지러운듯 코우키가 몸을 비튼다. 



"행복하다, 코우키. 너가 있어서 행복해"
"응, 나도 사랑해 세이"



서로 마주보고 웃으면서 깊게 입을 맞춘다. 기분 나쁘게 따가웠던 햇빛이 이제는 부드럽게 따스한 빛으로 방 안을 가득 매운다. 마치 코우키처럼.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