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가버스 주의

임신수 주의







*


"왕비를 다시 뽑아야합니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귀족 가문에서 뽑아야합니다"

"고려해보지"


도피가 회의장을 떠난다. 그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베르고가 도피를 따라 나선다. 방으로 온 도피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집는다. 베르고는 그저 문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로우가 도망친지 세달이 지났고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겨우 로우에 대한 소문을 수습했더니 대신들이 난리였다. 도피는 방한켠에 걸쳐져있는 자켓을 바라보았다.


"왜 죽이지 않았지?"


가만히 지켜보던 베르고가 입을 연다. 그의 질문에 도피가 눈길을 주자 베르고가 말을 잇는다.


"감옥에 가둔것도 그렇고 도망칠때도 그렇고"

"..."

"사랑하나?"


유리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난다. 바닥에는 유리조각과 갈색의 액채들로 엉망이다. 베르고의 목에 압박감이 든다. 


"지금 나와 농담하자는건가?"

"농담으로 들리나? 왜 죽이지 않고 지금까지도 수색대를 보내지 않는지. 왜 국민과 성 안의 소문들을 잠재우는데만 신경을 쓰는건지. 원래 너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행동만 하고 있는데. 내 말이 농담같은가?"


베르고가 내동댕이 쳐진다. 도피가 소파에 길게 누워 팔을 이마에 덮는다.


"나도 모르겠다"


도피 옆의 1인용 소파에 베르고가 앉는다. 팔로 눈을 가리고 있어 도피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베르고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결심한다.


"그 꼬맹이가 돌아오길 바란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슨소리야"

"로우가 먹던 티타임 디저트에 호르몬약이 섞여있더군"


도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르고의 멱살을 잡아 밀어붙인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사납다. 베르고가 침착하게 말한다. 얼마전에 안 사실이다. 도피가 허탈한듯 다시 소파에 기댄다.


"그럼 일단 그쪽이군"

"좀 더 조사해보지"

"수고해줘"


베르고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도피가 베르고를 올려다본다.


"네 마음도 정리해두는 게 좋을거다"





*


"아이아이!"


이제 성인의 키까지 자란 베포가 바닷가를 뛰어다닌다.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 옆자리에 사치가 앉는다. 몸은 괜찮나? 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드레스로사에 갇혀있었을때 베포가 어떻게 사람을 데려와 가까스로 탈출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봤을 땐 어렸을 적 한동네에서 살던 사치와 펭귄이었다. 마을을 나가더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양생물학자라는 말에 로우는 웃음을 터트렸었다. 덕분에 잠수함으로 손쉽게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쪽은?"

"아아. 괜찮아"

"27주라 했나?"


로우가 고개를 끄덕이곤 배를 쓰다듬었다. 볼록한 배가 아직도 생소하다. 임신 초기에 영양섭취나 환경이 좋지 않았던지라 임신기간에 비해 배가 나오지 않았다. 사치가 가져온 과일접시를 내밀자 로우가 과일을 집어먹는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평소보다 많이 먹고있었다.


"여기 생활은 어때"

"정말 한적하군"

"...드레스로사는"


사치의 말에 로우의 표정이 굳는다. 사치는 조금 망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소문이 거의 가라앉았다더군"

"..."

"그리고 널 음해한 세력을 찾고있다는 게 뒷세계의 정보"


로우의 눈이 크게 떠진다. 로우가 드레스로사에서 도망친지 여섯달이 지났다.






도피는 습관적으로 입고있는 자켓의 털을 만지작 거렸다. 로우가 떠나고 로우를 음해한 뒷세력을 찾기 시작하면서 그는 로우의 방에 지내는 횟수가 늘었다. 주인이 없는 방 같지 않게 그의 옷이나 책은 모두 그대로였다. 조사를 시작한지 두달이 지나서야 슬슬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약을 거래하던 자를 찾아냈다. 지금쯤이면 심문을 당하고 있을거다. 눈을 감고 1월달의 그 때를 다시 떠올렸다.


'도피, 날 사랑해?'

'아니'

'난 당신을 사랑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아니'라는 말만은 하지말껄 그랬다. 로우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고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신 또한 마음을 품고 있을줄은. 그렇게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사랑하냐 묻던 그 어린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물음에 돌아온 차가운 대답은 어떻게 다가갔을까. 도피는 문득 로우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불안해졌다. 모든걸 해결하고 찾아갔는데 그가 자신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도피는 고개를 휘저었다. 자신은 로우의 마지막 말을 위해서 앞만 보고 가면 된다. 몸을 일으켜 지하감옥으로 향한다. 고문실의 문을 열자 아직은 괜찮은 모습의 남자가 보인다. 남자의 앞에 다가가 섰다.


"그래. 뒤에 누가 있지?"

"말할수없다"


도피는 작게 웃었다. 시간을 줄 필요도 없겠군. 그대로 불에 달군 부지깽이를 들었다. 그딴말 들으려고 물어본게 아닌데? 남자의 살을 지지자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물론 비명까지 함께 들린다. 이러든 저러든 죽을건데 억울하게 혼자 죽을 수는 없지않나. 부지깽이를 떼며 몸을 숙여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저승길 동지로 삼아주지. 그리고 네가 죽고 난 후에 너의 가족에게는 적당히 후원하겠다. 도피의 말에 남자가 입술을 꾹 깨문다. 다시 부지깽이를 들이대자 결국 남자가 입을 연다.


도피는 감옥에서 빠져나와 전보벌레를 꺼낸다. 신호음이 몇번가고 베르고의 목소리가 들린다. 


"베르고. 알아냈다"






"전율이 흐르는군"

"거의 1년 걸렸나"

"9개월이야. 찾기시작한걸로 따지면 다섯달"


도피는 콜로세움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도피가 등장함께 따라 관객들이 열광한다. 도피는 자신의 앞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 몇몇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성들이여! 나의 왕비는 이들에게 음해되었다. 그래서 왕비는 지금 이들을 피해 숨어있다"


관중석에서 야유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 끝에 잡은 뒷세력은 대신들부터 귀족들까지 돈과 권력이 눈이 먼 자들이었다. 부디 이 소식을 어디엔가 있을 로우 또한 듣길 바랐다.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백성들은 이 쇼를 즐겨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곧 그대들의 왕비를 다시 드레스로사로 데려오겠다"


함성소리가 들리고 도피는 등을 돌려 콜로세움을 빠져나간다. 등 뒤로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린다. 도피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로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위해 움직일 차례였다. 다시 또 기나긴 여정이 되리라.


'구하러와줘'






"정말 어이가 없군"


토스트를 씹으며 펭귄이 말했다. 보던 신물을 테이블에 던지자 나머지들이 신문을 바라본다.


[드레스로사 왕비 음해사건]


진실이 밝혀졌군. 사치의 말에 베포가 웃는다. 로우는 기사의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결국 자신은 권력의 다툼으로 인해 희생된 것인가. 조금 허탈해졌다. 이제 배는 만삭이었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날짜에 비해 배는 덜 나와있었다- 의사의 말로도, 자신의 느낌으로도 다음주나 그 다음주쯤에는 출산을 할 것이다. 조금 갑갑해져 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책. 짧게 내뱉고는 힙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떼며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펭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따라간다"


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는 해변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어느새 여기 온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다. 스무살에 나가려했던 바다는 19살에 예기치못한 일로 쫓겨나듯이 나왔다. 이제는 어렴풋한 도피의 모습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자신의 배 안에 있는 이 아이는 도피의 아이였다. 도피의 아이. 실감이 나지 않아 배를 만지작거렸다. 그런짓을 당해놓고도 떠나지 않는 마음이 신기했다. 아이에게 아버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자신이 출산을 할 때 도피가 옆에 있어줄까. 몸이 식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벗어뒀던 신발을 신기위해 모래사장 끄트머리로 왔을 때 갑작스러운 복통이 일어났다. 로우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자 로우를 지켜보고 있던 펭귄이 로우에게 뛰어온다.


"로우 무슨 일이야??"


펭귄이 로우를 부축한다. 로우는 불규칙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양수.. 양수가... 로우의 목소리를 들은 펭귄의 얼굴이 질린다. 잠깐 기다려봐! 베포! 펭귄의 목소리를 들은 베포가 집에서 나온다. 로우의 상태를 보고 급히 뛰어와 로우를 등에 태운다.


"의사 불러올테니 집에 가있어"


펭귄이 마을쪽으로 사라지고 베포가 로우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의사와 펭귄이 돌아와서는 출산 준비를 한다. 생각보다 빠른 출산에 의사 또한 긴장한다. 더욱이 평소에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로우인지라 시간을 끌었다가는 로우의 생명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로우의 비명이 집안을 뒤덮었다. 출산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로우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로우는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아이의 머리만 나오면 산모의 생존률은 올라간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거의 머리가 나온 상태였다. 조금 더 힘을 내면 살수있다. 베포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 도피..."


로우의 입에서 신음처럼 도피의 이름이 나온다. 로우의 손을 잡고 있는 펭귄은 혹시나 로우가 죽을까싶어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이를 낳아야해 포기하지마 로우, 아이를 낳아야 그 망할놈을 볼수있잖아. 펭귄을 말에 로우가 입술을 악 문다.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의사의 탄성이 들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도피가.. 도피가... 보고싶어. 마지막으로... 도피를 보고싶어.."


로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