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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킷치는 귀중한 재능을 너무 아낌다. 키세가 테이블에 늘어놓여져있는 쿠키 하나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공감을 바라는 눈빛으로 세사람을 바라본다. 하지만 미도리마와 쿠로코는 눈을 돌려버린다. 아카시와 눈이 마주치자 맹렬하게 '그렇다고 말해' 라는 눈빛을 보낸다.




"아아- 그래"


"반응이 그게 뭠까!"


"확실히 아츠시의 쿠키는 맛있지"




이제서야 만족한듯 키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시는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아망드쇼콜라를 집어먹었다. 사실 세사람에겐 얘기하지 않았지만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쿠키들은 무라사키바라의 실패작이었다. 사먹는 건 싸구려 우마이봉을 사 먹으면서 만들어 먹을 땐 거의 완벽을 추구하는 그는 우연찮게 만난 아카시에게 이 쿠키들을 전부 넘겼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세사람은 맛있게 먹고있었지만. 실패작도 나름 마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말입니다, 아카시군"


"응"


"2호 산책 시키다가 후리하타군을 만났는데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던데요"




세사람의 시산이 쿠로코에게 박힌다. 아카시 또한 몰랐던 사실이라 놀란 눈치였다. 쿠로코는 말을 정리하는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연다. 중간고사 보던 중에 차였다고 말했는데, 아카시군 몰랐나요?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던 사실이야. 그러더니 이내 몸을 일으킨다. 난 방에 간다. 쿠키 안 드심까?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키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시는 게단을 올라가면서 짧게 생각을 정리한다. 헤어진 건 몇일전. 근데 자신에게 말을 안 함. 차임.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카시가 한숨을 쉬었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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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자신의 옆에 앉아 필기를 하고있는 후리하타를 흘긋 바라보았다. 이노우에를 꽤 좋아했을텐데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인다. 헤어질쯤엔 이노우에에게 마음이 거의 없었던걸까. 아카시는 필기하던 손을 멈추었다. 혹시, 혹시나 자신을 좋아해서? 아카시의 손에 쥐어져있던 펜이 힘없이 쓰러진다.




"세이, 어디 안 좋아?"


"...아니"




책상에 널브러진 펜을 다시 쥔다. 하직 확신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는 건 어쩔수 없었다. 아카시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 강의가 마지막이니까 같이 집에 가면서 물어보면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은 차분해져 칠판을 바라본다. 앞부분을 놓친걸 깨닫자 인상을 쓴다. 다시 따로 읽어야겠군.


시간이 시간인지라 하늘이 석양으로 인해서 붉다. 지는 해가 아카시는 제법 볼만하다고 느꼈다. 하늘이 높은 계절이니만큼 붉은빛이 넓게 퍼져있었다. 후리하타는 얼마전에 공원에서 쿠로코를 만났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그러고보니 말인데"


"응?"


"이노우에랑 헤어졌다며"




후리하타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카시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후리하타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아카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공원 방향을 가리켰다. '좀 걷자' 언젠가의 상황 같았다. 공원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후리하타는 벤치에 앉을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


"생각보다는"




침묵이 흐른다. 후리하타는 먼 곳에서 산 속으로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그와 반대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톱 끝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어떻게 말해야할까. 아카시는 손톱끝에서 후리하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아카시의 시선을 느꼈는지 후리하타가 고개를 돌린다.




"내가..."


"..."


"이노우에보다 내가 널 더 행복하게 해줄 자신있어"




아카시는 입술을 꾹 물었다. 진부한 문장이었다. 진심이 오롯이 전해진 것 같지 않아 애가 탔다. 내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답지않게 긴장이 되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카시를 말없이 바라보던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손을 잡는다. 괜찮아, 천천히 말해. 아카시는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에 조금 용기가 생겨 입술을 움직였다. '나랑 연인사이로 교제하지 않을래?'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바라보았다. 후리하타는 머뭇거리더니 곤란한듯 웃었다.




"미안"




아카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아직 이노우에와의 이별 때문에 받아들일수가 없는걸까. 아카시는 떨리는 목소리고 '왜?'라고 물었다. 나는 세이한테 연애감정 느끼지 않으니까. 돌아오는 후리하타의 대답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럼 입은 왜 맞춘거야? 그런 감정이 아닌데 왜 나와 살을 부볐던거야?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럼 무슨 감정으로... 왜.. 내 키스를 받아들인거야?"


"세이 아파"




후리하타가 아픔에 인상을 썼지만 아카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세게 팔을 움켜쥐고 후리하타를 몰아붙였다. 이유가 뭐야. 너는 내 몸만 좋았던거야? 아니면 내가 널 좋아하는 걸 비웃은거야? 이유가 뭐야? 응? 코우키 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였어? 아픔을 참지 못한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손을 뿌리쳤다.




"아프다고 했잖아!"


"그럼 대답해! 왜 날 받아줬냐고!!"


"안타까워서 그랬어! 너나 나나 짝사랑이잖아. 니 마음이 이해가 가니까 불쌍해서 받아들였던거야"




좌절, 절망. 아카시의 눈동자에 그런 감정이 담긴다. 후리하타는 노란색으로 바뀐 눈동자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크면서 눈물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카시는 여전히 눈물이 많았다. 후리하타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십년 넘게 지냈던 우정으로 울고있는 그의 옆을 게속 지켰다. 한참 소리없이 울던 아카시가 가로등이 켜질 쯤 몸을 일으킨다. 후리하타는 눈가가 붉은 아카시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노란색이었다.




"어리광 받아줘서 고마웠어. 이제 안 받아줘도 돼"


"응"


"그리고"




아카시가 고개를 숙인다. 무언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후리하타에게 손을 내민다. 잠깐 핸드폰 좀 줄래? 후리하타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폰을 몇번 만지작 거리더니 이내 돌려준다. 자신의 핸드폰도 꺼내어 무언가를 하더니 다 된듯 똑바른 시선으로 후리하타를 바라본다. 더이상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생소하다.




"이제 아는 척 하지말자"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말이 이해가 가지않아 몇번이고 그 단어를 읊조렸다. 아는 척 하지말자. 아는 척 하지말자. 그 말은 남이 되자는 말 아닌가? 후리하타는 정신을 차리고 아카시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없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아카시는 공원 입구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후리하타는 급하게 아카시에게 달려갔다. 그의 팔을 붙잡자 아카시가 고개를 돌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남처럼 지내자고"


"그러니까 왜?"




아카시는 몸을 돌려 후리하타와 마주 보았다. 다시 붉은빛으로 돌아온 눈동자에 심장이 빠르게 뛴다. 벌써 정리한거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 이렇게 빠르게 정리해?




"나는 그런 감정 필요없었어. 지금도 필요없고. 십년을 넘게 같이 지냈으면서 그런 감정으로 날 대할줄은 몰랐어. 너에게 바보같은 감정을 강요한 나도 한심하고, 동정으로 날 받아준 너도... 하아.. 됐다. 난 너랑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못 지낼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쉽게 끊어질 사이야?"


"넌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이인 내 입술을 쉽게 받아들였잖아. 그것처럼 이것도 어려울거 없어"




아카시를 잡고있던 손에 힘이 풀린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몸을 돌린다.




"안녕, 후리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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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을 열자 티비소리가 들린다. 거실을 지나친다. '다녀왔어' 늦었네요. 피곤함까? 피곤하면 얼른 쉬세여. '응' 다시 티비소리가 들리고 이제는 세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드라마 말고 다른 거 보면 안됩니까? 재미있다는 것이다. 제가 나오는 프로그램 보자니까여! 계단에 발을 딛자 삐걱거리는 목재소리가 들린다. 8개. 8개. 총 16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2층 복도 제일 끝에 있는 큰 방의 문을 연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몸을 눕힌다. 눈이 뻑뻑한듯해 몇번 깜빡거리자 금새 베개가 축축하게 젖는다. 손을 들어올려 젖은 뺨을 닦지만 무용지물이다.


몸을 돌려 책상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사진이 액자에 끼워져있다. 한때 저 액자를 뒤집어 놓았던 적도 있었다. 아카시는 몸을 일으켜 액자를 집어들었다. 꽃다발을 들고 교복을 입은채로 환하게 웃고있는 자신과 후리하타가 보인다.




"정리해야지"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창고에서 빈 상자를 가져와 후리하타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박스 안에 넣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졸업앨범. 그와 찍은 사진들이 담긴 사진앨범. 같이 가지고 놀던 보드게임. 후리하타가 추천해서 샀던 소설책.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지루할 때마다 낙서했던 연습장. 후리하타와 처음 농구를 하면서 샀던 공. 그를 닮은 것 같아 좋아했던 쵸파 피규어. 같이 읽었던 만화책. 항상 가고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사두었던 영국 여행 책자. 중학교 때 놀이공원 갔을 때 샀던 기념품들. 서로 중,고등학교 졸업식 때 떼어주었던 단추. 우연히 취향인듯한 노래를 찾았다며 선물 받았던 앨범. 이때까지 후리하타에게 받았던 생일선물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바라보았다. 11월 2일. 곧 있으면 후리하타의 생일이었다. 아카시는 작년의 생일에 받은 게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시계.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어 미련없이 박스에 던진다. 벽에 걸려있던 달력도 빼서 박스에 넣은다. 올해 1월 1일에 함께 가서 샀던 달력이었다.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서로 남이다. 자신이 후리하타의 생일을 챙길 이유는 없었다. 아카시는 옷장을 열어 목도리와 장갑을 꺼냈다. 전부 후리하타와 같이 가서 산 것들이었다. 즐겨입던 스위터, 약간은 큰 청바지.


방 안 곳곳을 뒤져 후리하타와 관련된 물건을 박스 안에 넣었다. 총 9개의 박스가 나왔고 창고까지 가져가기에는 너무 많아 쓰지않던 붙박이장에 넣어두었다. 정리가 끝나고 둘러본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삶에 후리하타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카시가 쓰게 웃고는 침대에 앉았다. 손 끝에 딱딱한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의 그 액자다.


벛꽃이 만개한 교정. 그 속의 두사람. 아카시는 조심스럽게 엄지로 유리를 문질렀다. 누군가가 꽉 쥔듯 죄여오는 심장이 아프다. 투명한 유리에 비치는 후리하타의 미소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아카시는 액자에 고개를 파묻고는 숨을 죽였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안녕, 코우키'




"안녕"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