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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강의실이 북적거린다. 11월 8일. 오늘은 후리하타의 생일이었다. 몇몇 친한 동기들이나 후배들이 술집에 가자며 난리법석이다. 어이, 아카시. 너는 안가냐? 한 동기의 물음에 가방을 챙기던 아카시가 웃는다. '난 선약이 있어서' 그럼 어쩔수 없지. 우리끼리 가자. 그 사이 아카시는 강의실을 나간다. 


아카시와 후리하타, 두사람이 싸웠다. 과내에서는 이미 그렇게 소문이 퍼졌다. 3년동안 붙어다니던 두사람이 서로 말도 하지않고 생일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같은 학과생들은 두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도출해낼수 있었다.




"후리, 가자"


"어? 응"




아카시가 앉아있단 자리를 멍하게 보던 후리하타가 웃는다. 오늘 마시고 죽어야겠다. 바보야, 내일도 수업있다.




검정색 아이폰, 아카시는 손에 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이것 또한 후리하타와 관련된 물건이었다. 그날 공원에서 아카시는 후리하타와 자신의 폰에 저장되어있는 서로의 번호와 메일주소를 지웠다. 후리하타는 몰라도 자신은 지우든 말든 상관없었다. 손이 외우고 있는 번호였으니까. 아카시가 혀를 찼다.




"아카싯치! 많이 기다렸슴까?"


"아니"


"우와, 아카싯치랑 쇼핑이라니 두근두근함다"




평소에는 후리하타와 다녔으니까. 아카시는 텅 빈 방이 보기 삻어 쇼핑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혼자 갈까싶기도 했지만 그렇게되면 자신의 꼴이 너무 처량할 것 같아 쇼핑에 관심이 많은 키세를 끌고왔다. 예상대로 키세는 신이 나서 여러 브랜드를 줄줄 읊었다. 아카싯치 같은 분위기면 폴로 어때여? 그런 싸구려를 왜 입어. 엑? 그럼? 돌체앤가바나. 헐?


양손이 가득 찰 정도로 쇼핑백의 개수가 많았다. 옷도 옷이었고 책이나 생활용품도 사다보니 어깨가 무거웠다. 키세의 차에 짐을 내려두고 카페에나 갈까 싶어 걸음을 떼는데 백화점 맞은편에 핸드폰 가게가 보인다. 아카시는 자신의 핸드폰을 만졌다가 키세를 불렀다. '료타, 들렀다가자' 키세는 아카시가 가리키는 가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싯치, 폰 산지 일년도 안됐지않슴까? 아이폰이 별로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카시가 길을 건너 핸드폰 가게로 들어간다.




"뭘로 바꾸게여?"




진열장을 쭉 훑어보던 아카시가 한 곳에 시선이 머문다. 블랙베리. 아카시가 가게 직원에게 말을 건다. 뒤에서 아카시가 핸드폰을 바꾸는 모습을 지켜보던 키세가 한숨을 쉰다. 언뜻 들리는 가격은 꽤 비쌌다. 번호는 그대로 하시겠어요? 바꿀겁니다. 아카시의 핸드폰 뒷자리 번호는 후리하타의 생일이었다. 물론 후리하타의 뒷자리 번호는 아카시의 생일이었고. 텅 비어있던 방, 과도한 쇼핑, 무리한 핸드폰 교체, 새로운 전화번호. 이제서야 아카시의 행동들이 이해가 간 키세가 울상을 짓는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키세는 후리하타가 원망스러워졌다.




내일 수업이 있는 관계로 술자리는 자정 전에 끝났다. 후리하타는 입안에 감도는 쓴 맛에 혀를 굴렸다. 동기들을 먼저 보내고 다른 곳에 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단 6일, 아카시와 떨어져있었다. 아니 아카시와 6일 동안 남이었다. 자신의 삶에 6일째 아카시가 없다. 상상보다 훨씬 괴로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코우키"




후리하타가 고개를 들었다. '코우키'라고 불러서 당연히 아카시인줄 알았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건 이노우에였다. '미안한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줄래?' 후리하타가 쓰게 웃었다. 이노우에는 후리하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혹시 이노우에는 후리하타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할까? 후리하타는 술잔의 술을 털어마셨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분명 이노우에를 좋아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관심 밖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동정이라고 생각했던 아카시만이 후리하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삶의 반쪽, 나의 버팀목, 지지대. 도대체 그게 다 뭔데.




"술도 약하면서 왜 이렇게 마셔"


"신경쓰지마. 너랑 상관없잖아"




정말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자신에게 이런 존재가 됐을까. 6일전보다는 한참 앞인 것 같은데. 술기운에 어지러워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왜 왔어, 용건이 뭐야. 목소리가 테이블과 마찰해 웅웅거린다. 이노우에는 한참 말이 없더니 한숨을 쉰다. 후리하타는 슬슬 짜증이 났다. 도대체 왜 온거야.




"아카시랑 싸웠어?"




정말로 화가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이노우에의 머리채를 잡고 '그 입에 세이의 이름을 담지마'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아니' 후리하타는 숨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절교했어' 어지러운 머리가 어느정도 진정된 것 같아 상체를 일으켰다. 마주친 이노우에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있었다. 니가 왜 놀라. 후리하타는 조소를 흘렸다.




"너네 사귀는 거 아니였어?"


"무슨 근거로?"


"키스했잖아"




들켰던거구나. 언제? 아니, 그것보다. '아카시의 일방적인 애정이었어' 아카시. 그 이름이 생소해 입술을 꾹 깨문다. 혀가 그 이름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는 그냥 세이라고 튀어나왔다. 후리하타의 말을 들은 이노우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방적이라고 하기엔 너네 둘 다 눈빛이 똑같았는데?"


"뭐?"


"사랑스럽다는듯이 쳐다봤잖아"




내가? 이노우에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아닌데, 나는 그냥 불쌍해서, 그래서, 받아준건데. 넋 놓고 중얼거리는 후리하타의 말을 듣던 이노우에가 잔뜩 인상을 쓴다. '무슨 소리야? 너 불쌍하다고 애인있는데도 키스 받아주는 저질이었어?' 후리하타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넌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이인 내 입술을 쉽게 받아들였잖아.




"왜 또 울어"


"우으... 모르겠어, 머리가 아파. 아니 가슴이 아파.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나 왜 이래? 왜 이러는거야? 어디 아픈거야? 눈을 가려도 손틈새로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가슴이 죄여오듯 아팠다. 숨이 턱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이노우에는 말없이 후리하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엇갈리기만 하는 애정이군. 이노우에는 후리하타에게 답을 말해줄까 고민했지만 이내 관뒀다. 너무 쉽게 알게되면 쉬운 것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술값 계산해줄테니까 집에 가"


"내가 낼께"


"생일선물이야. 나름 죄책감 더는 것도 있고"




뭔가 나 때문에 둘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서. 후리하타가 몸을 일으킨다. 세이가 보고싶어. 이노우에가 후리하타를 잡아챈다. 지금 아카시한테 가면 사이 더 나빠져. 왜? 그런게 있으니까 얌전히 집에 들어가. 후리하타가 테이블에 고개를 박는다. 세이, 세이. 쉴새없이 그 이름을 읊조리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보아하니 아카시에게 '난 너 안 좋아해'라는 식의 말을 했다가 절교 당한 것 같은데 보러간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자기 마음이라도 좀 제대로 알아채고 가던가. 이노우에는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늦기전에 깨달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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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침이면 하얀 입김이 나온다. 11월 말인데도 날씨는 벌써 초겨울이었다. 후리하타는 목도리를 더 꼭꼭 둘러맸다. 올해 겨울에 영화관에 갔다가 아카시랑 바꿨던 목도리였다. 그때만해도 후리하타는 이노우에에 대한 연애상담으로 아카시를 불러냈었다.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절로 인상이 쓰인다. 아카시는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연애상담에 응했을까.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내 얘기를 듣고 있었을까. 코 끝이 시큰거려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카시와 같은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일주일 중 아카시와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요일. 후리하타는 교실 구석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카시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핸드폰의 키패드를 두드리는 아카시의 모습은 익숙하면서 생소했다. 뭐가 바뀐거지? 강의실 뒷편에 앉아 아카시를 뜯어보던 후리하타는 그의 핸드폰이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블랙베리. 분명 올해 초에 같이 핸드폰을 바꾸었고 후리하타에게 '2년정도 쓰지않을까?'라고 말했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핸드폰 그리고 문득 느껴진 텅빈 손목. 핸드폰에서 사라진 아카시의 번호. 후리하타는 최근 한달동안의 아카시가 입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반 이상의 옷이 자신이 모르는 것들이었다. 나에 대한 물건을 모두 정리한건가? 후리하타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핸드폰이 책상아래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주위의 시선이 전부 후리하타에게로 집중된다. 아카시의 시선도 후리하타에게 닿았다.




"야, 왜그래?"


"어? 아아, 몸이 안 좋네. 미안"




후리하타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주웠다. 정말 아카시가 그의 삶에서 자신을 지웠다는 걸 깨닫자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후리하타는 몸을 일으켜 강의실을 나왔다. 시계를 확인하자 강의 시작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후리하타는 억지로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옮겨 오늘 강의가 있는 교수님들을 찾아 뵈어 몸이 좋지않아 도저히 수업을 듣지 못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교수들의 허락을 받은 후리하타는 집 근처, 그 때의 그 공원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후리하타의 몸 곳곳을 훑고 지나간다. 후리하타는 벤치에 몸을 깊게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을 좋아하던 아카시는 저렇게 태연하고, 아카시를 밀어내버린 자신은 힘들어하는가. 후리하타는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쓸었다. 생일날 이노우에가 술집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네 둘 다 눈빛이 똑같았는데? 사랑스럽다는듯이 쳐다봤잖아' 내가? 후리하타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같은 눈빛, 같은 마음. 머리가 복잡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 그런게 분명해. 후리하타는 자세를 고쳐앉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자. 그렇게 읊조리고 천천히 생각을 갈무리한다. 


아카시가 처음 마음을 고백했을 때 제일 처음 들었던 감정은 당황, 놀람. 키스할 때는 슬픔. 

 일단 불쌍함, 연민의 감정은 없었다. 

그 후에 아카시를 볼 때는 어색함, 긴장. 결국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을 때는 우월감, 죄책감. 여름방학 때 같이 놀러갔을 때는 긴장, 두려움. 마지막날 밤에는 편안함. 그 후에 방학 땐 편안함 그리고 의아함. 아카시와 모텔에서 그런 일을 할 땐 욕망. 그 일이 있고나서 자신에게 손 대지 않는 아카시를 보며 불안, 초조. 다시 입을 맞출 땐 안심. 후리하타는 이마를 짚었다. 

 동정 따윈 그 어디에도 없다. 

자신은 그 상황에서 왜 동정이라고 말했건걸까. 술도 마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후리하타는 자괴감이 들어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후리하타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현재는 도저히 모르겠다. 좋아한다면 아카시와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아니라면 그저 평생을 같이 살아 온 친구라는 이유로 그를 갈망했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좋아한다해도 아카시가 자신을 받아줄지 의문이었고, 자신 또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남자와의 연애를 받아 들일수 있을지 몰랐다. 멍청이. 후리하타는 한숨을 쉬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가 다 놓치고 말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점심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4시간 가까이 밖에 있다보니 몸이 얼었다. 후리하타는 몸을 일으켜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집에 아무도 없을터였다. 집으로 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추웠다. 온기를 원했다. 후리하타는 문득 여름에 춥다던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던 아카시가 떠올랐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질끈 감는다.




'코우키' 

아카시다. 후리하타는 눈을 깜빡였다. 손을 뻗자 아카시가 잡힌다. 

'코우키' 

아카시가 웃는다. 후리하타도 웃었다. 다가가서 껴안고싶은데 몸이 무겁다. 다시 아카시에게 손을 뻗는데 저 멀리 떨어져 잡히지 않는다. 움직이기 위해 발을 떼는 순간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다. 뜨거워, 뜨거워- 

'코우키' 

세이!




"코우키"


"...엄마?"


"아프니? 열나고 식은땀 흘리네"




후리하타가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겁다. 옷도 안 갈아입고 잔거야? 어떡하지, 집에 약이 다 떨어졌는데. 엄마가 이따 나갔다오면서 사올께. 후리하타가 고개를 젓는다. 제가 다녀올께요. 약국 멀잖아. 괜찮아요. 몸을 일으켜 지갑만 챙긴다. 목도리를 두르고 방을 나가자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 해놓을테니까 먹으렴. 대답할 여력이 없어 아무말 없이 현관문을 연다.


약국은 시내에 있었다. 주택과 아파트, 멘션이 들어선다고 약국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걷자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가 나온다. 어두운 하늘을 보니 오후 내내 잔듯했다. 후리하타는 약국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약국이 어디 있더-




"어"




아카시였다, 옆에 무척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와 같이 있는. 아카시는 다정하게 웃으며 여자아이와 머리핀을 보고있었다. 한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표정. 아카시가 머리핀을 집더니 여자아이의 머리에 대어본다. 두사람이 무언가 얘기하는듯 하더니 마주보며 웃는다. 여자아이가 귀걸이 하나를 집더니 아카시의 귀에다 가져다댄다. 망측한 모양새에 이번엔 입을 벌려 크게 웃는다.


뺨이 간지러워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축축한 것이 손을 적신다. 후리하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다시 나갔는지 돌아온 집은 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후리하타는 침착하게 옷을 벗었다. 한숨 자고나면 괜찮아질거야. 눈을 감았다 뜨면 괜찮아질거야. 후리하타는 외투를 벗고 목에 둘러져있는 목도리를 풀었다. 검정색 목도리. 아카시가 줬던 것. 후리하타는 무너져내려 목도리를 품에 안고 오열했다. 


세이가 없으면 안돼. 나는 세이뿐이야. 다른 사람한테 가지마. 내가 잘못 했으니까 다시 돌아와줘. 보고싶어 세이. 내가 착각했던거야. 네가 너무 좋아. 심장이 부서져 내리도록 널 좋아해. 늦게 알아서 미안해. 상처 주어서 미안해.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았어.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후리하타는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두려움이 어둠과 함께 뇌를 잠식한다. 무서웠다. 후리하타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에 있다간 어둠에 잡아먹혀 사라질 것 같았다. 일단 어둠에서 벗어나야해.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나섰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