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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닫이문을 열자 새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간밤동안 수북하게 쌓인 눈에 괜히 기분이 설렌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둘러쓰고 자는 그에게 다가간다. 옆에 앉아 어깨를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세이쥬로' 이름을 불러보지만 여전하다.




"안 일어나네. 그럼 나 혼자 산책 가야겠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불속에서 나온 손이 팔을 붙잡는다. '일어났어, 같이가' 후리하타가 웃는다. 씻어, 기다려줄께. 아카시가 몸을 일으켜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기지개를 켜고 욕실로 들어간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간 방향과 반대쪽에 있는 방에 들어간다. 탈의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자 김이 피어오르는 온천이 나온다. 온천 가장자리로 눈이 쌓여있다. 오늘 밤에는 눈 보면서 온천욕 할 수 있겠네. 문을 닫고 다시 원래의 방으로 돌아오니 벌써 다 씻은 아카시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내가 말려줄까?"


"드라이기로 부탁해"




후리하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드라이기를 찾아와 플러그에 꽂는다. 앉아있는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짧은 붉은색 마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기분좋다. 머리가 짧은 덕에 금세 마른다. 아카시가 옷장을 뒤적여 옷을 껴입는다. 밖에 눈 많이 쌓였으니까 두껍게 입어.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웨터를 꺼내든다. 아카시의 이번 생일에 후리하타가 선물해준 스웨터였다. 아카시가 모직코트를 스웨터 위에 입는다. 목도리까지 챙겨 매면서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후리하타를 흘긋 본다.




"너 목도리"


"아, 맞다"




몸을 일으켜 방 한쪽 구석의 옷걸이에서 빨간 목도리를 가져온다. 목도리를 두르니 얼굴 반이 가려진다. 뒤늦게 아카시가 사준 후리하타의 생일선물이었다.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가자. 여관 뒷편에는 산을 따라 산책로가 나있었다. 간밤에 눈이 왔음에도 길 부분의 눈은 치워져있다. 산책로를 따라 몇분 걷다보니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공터가 나온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밭에 후리라타의 눈이 빛난다. 줄곧 깍지끼고 있던 손을 놓고 눈밭에 폴짝 뛰더니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난다.




"내가 첫 발자국이야!"




그는 이제 곧 대학교 4학년이 될 남자였다. 나이답지않은 순수함에 아카시가 작게 웃고는 공터에 발을 디딘다. 내가 두번째 발자국. 후리하타가 웃더니 공터 곳곳에 발자국을 남긴다. 한참 돌아다니는가 싶더니 몸을 숙여 눈을 뭉친다. 눈뭉치를 하나 만들더니 가만히 서있는 아카시에게 던진다. '결투를 신청한다' 엉겁결에 눈에 맞은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결투신청을 듣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 '받아들이지' 


예전부터 아카시는 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 중학교 3학년 초까지만 해도 후리하타가 아카시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카시가 후리하타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아카시는 계속 지기만했다. 후리하타는 그 승리가 자신의 실력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아카시가 봐준 것 뿐이었다. 




"항복, 항복! 내가 졌다"


"나에게 이기는 건 백년은 일러"




아니 천년. 어련하시겠어요. 후리하타는 옷 안에 들어간 눈을 털어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으, 눈이 녹아서 축축해. 아카시는 말없이 추위에 잔뜩 붉어진 후리하타의 손을 잡아쥔다. 코우키, 너 손 차가워. 너가 더 차가워. 두사람이 서로 마주보더니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오른속을 끌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여기 뒷편에 있는 절에 가보자. 예전에 거기서 소원 빌었었어. 무슨 소원? '코우키랑 천년만년 행복하게 해주세요' 후리하타가 미소짓더니 아카시의 얼어붙은 뺨에 입을 맞춘다.




"세이, 행복해?"


"당연하지. 넌?"


"나도 행복해"




소원 이뤄졌네! 천년만년 행복해야 이뤄진거지. 그런가, 아무튼 산책 다 하고 빠칭코 가자. 안돼. 왜? 너 그런데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잖아. 윽, 그럼 오락실. 그래. 그렇다면! 리듬게임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또? 응, 이길 때까지 신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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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후리하타는 오락실에서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저녁 먹기 전까지 계속 했지만 그 어떤 것도 후리하타은 이길수 없었다. 넌 왜 철권도 잘해? 글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티비를 켜자 그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나온다. 나 이 편 안본거 같은데. 후리하타가 아카시 옆에 붙어서 화면을 바라본다.




"세이는 쵸파 왜 좋아한거야?"


"너 닮아서. 넌 에이스랑 샹크스 왜 좋아했는데?"


"너 닮아서"




루피에게 에이스가 있듯이 나한테 세이가 있으니까. 샹크스는 붉은머리니까. 아카시가 웃는다. 다 보고 온천 들어가자. 응.


온천의 따뜻한 물이 온몸을 휘감는다. 물 밖에 나와있는 팔에는 차가운 공기가 붙는다. 가장자리에 쌓인 눈들을 바라본다. 후리하타는 올 한해의 일을 천천히 되새겨본다. 정말 다사다난한 일년이었던듯해 웃음이 나온다. 막 아카시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줄 알았다. 아카시가 떠나갈까봐 정신없이 손을 뻗던 그 때가 떠오른다.




"그러고보니"


"응?"


"그.. 우리 사귀기 전날 밤에... 저녁에 시내에 같이 있었던 여자애, 누구...야?"




아카시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츠키잖아. 사츠키? 후리하타가 기억을 못하는듯하자 아카시가 덧붙인다. 모모이.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엑? 모모이? 중학교 때 키도 작고 통통했었잖아!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처음에는 못 알아봤어.




"진짜 여자의 변신은 무죄구나"


"그것보다 코우키"




후리하타가 고개를 돌려 아카시를 바라본다. 아카시는 그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좋은 예감이 들어 도망가려는 후리하타의 팔을 아카시가 붙잡는다. 그 때 얘기하니까 생각나버렸어. 생각만해, 생각만 하라고! 생각만 하려했는데... 아카시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덩달아 후리하타의 시선도 내려간다.




"이렇게 돼서"


"으으... 살살해줘"




아카시가 매끈한 후리하타의 어깨에 입을 맞춘다. '노력해볼께'




후리하타가 녹초가 된 몸을 이불에 눕힌다. 아카시는 기분 좋은듯 후리하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후리하타는 아카시를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허리를 껴안는다. 뺨을 부비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리광 부리네, 코우키.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말에도 모르는척 허리를 감은 팔에 더 힘을 준다.




"세이이- 아이스크림 먹고싶어"


"이 겨울에?"


"겨울이니까"




아카시가 한숨을 쉰다. 사줄께. 아까까지 힘이 없던 몸이 벌떡 일어난다. 콘 아이스크림으로! 비싼거! 그래, 대신 한개만. 응. 현관에서 슬리퍼를 신다가 눈이 마주친다. 아카시가 고개를 숙여 후리하타의 입술에 짧게 키스를 한다. 후리하타가 푸스스 웃더니 아카시의 손을 잡는다. 가자. 하나로 이어진 그림자가 복도에 길게 이어진다.








*17편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백야퍼즐은 완결이 납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