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잨님 (@proozacc) 께 아이디어 받아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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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헤어질까?"




나는 고개를 들어 눈 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꼭 '머리가 하얘진다'라는 표현을 썼었다. 막상 내가 그런 상황에 닥치니 그게 보편화된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얘지기는 커녕 더욱 더 선명해지는 주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옅게 웃더니 물을 마신다. 이거 다 먹고 짐싸서 나갈께. 아침을 먹은지 4시간만에 나는 혼자 점심을 먹게 되었고, 혼자 살게 되었고 그리고, 혼자가 되었다. 짐이 많지 않았던 그였던지라 빈자리가 크게 눈이 띄지 않았다. 괜찮네. 나는 여느때처럼 점심을 먹고 책을 읽다가 티비 조금 보고 침대로 향했다. 넓은 침대는 오로지 나만의 공간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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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촉 끝의 잉크가 흰 종이에 퍼진다. 그들이 넓게 퍼지기 전에 재빨리 움직여 얇은 선을 만들어낸다. 사인이 완성되고 잉크가 마를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가 비서에게 서류를 건넨다. 나머지는 다녀와서 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시계를 확인한다. 11시 34분. 약속시간은 12시 정각이었다. 외투를 챙겨 사무실을 나선다. 회사건물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위치한 카페에 들어서자 제일 구석에 하늘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무슨 용건이야"




쿠로코는 대답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쿠로코의 맞은편에 앉았다. 쿠로코는 미리 주문해두었던 바닐라셰이크를 한모금 마시더니 그제서야 입을 연다. 괜찮은 척 하는건지, 정말 괜찮은건지. 눈치도 못채고 있었습니다. 많은 말들이 생략된 그 문장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아 말없이 미소지었다.




"얼마나 됐습니까"


"일년 조금 넘었어, 테츠야"




표정이 잘 없는 쿠로코임에도 일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정말 몰랐네요. 나는 그의 바닐라셰이크를 가져와 한모금 마셨다. 단맛이 입안에 감돌아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게 용건이었다면 이만 가도록 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정말 괜찮은겁니까?"




쿠로코의 걱정 어린 질문이 우스웠다. 이미 헤어진 것에 연연하면 나도 그도 힘들텐데, 그걸 아는 내가 굳이 그를 놓지 않을 이유는 현재로써는 없었다. 




"안 괜찮을게 어디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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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사람들 틈새로 손을 뻗었다. 따뜻하게 잡히는 온기를 끌어당기자 그가 품 안으로 들어온다. '멍하게 있지말고 붙어있어' 그가 날 올려다보더니 웃는다. 응. 전철이 멈추기를 몇번, 이번에 멈췄을 때 우리는 그 북적이는 인파로부터 해방되어 숨을 들이마셨다. 1교시 강의는 여러모로 지옥이야. 나는 웃었다. 엄살 부리지 말고 가자. 그의 손을 잡아끄는데 그가 슬며시 손을 뺀다. 나는 모르는 척 그의 어깨를 툭치고 앞서 걷는다. '강의실 앞자리는 비어있었으면 좋겠네'


대학 다닐 때 그의 눈은 항상 캠퍼스 안의 연인들에게 가 있었다. 선망의 눈빛.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었다. 나는 그가 헤어지자고 이별을 고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 때 물어보지 않았겠지. 나는 또 한 그의 이유를 이해했다. 나더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가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괜찮지 않았겠지. 이해하니까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가 결심을 한 순간부터 나는 그를 잡을수 없었다. 그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꺾기 힘든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를 잡으면 그도, 나도 힘들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난 그를 놓아주었다. 나를 떠나 좀 더 행복하길 바랐다. 


간만에 떠오른 그와의 추억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쩌다가 이 생각을 하게 됐지? 나는 손에 들고있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다른 책을 꺼내는데 책 사이에 꽂혀있던건지 무언가가 툭 떨어진다. 몸을 숙여 집어드니 그와 내가 같이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여름축제라며 유카타를 입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사진이었다. 그 때가 떠올라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손을 꼭 붙잡고 수많은 인파를 헤집으며 가게들을 구경했었다. 손가락 사이까지 땀이 차도 우리는 마냥 좋다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는 지금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이렇게 손을 꼭 붙잡으며 웃고 있을까.


가끔 그와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그를 떠올렸다. 아직 지워지지 않는 미련이 그가 날 기억해주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기억. 그 외에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 내가 바란건 그의 행복이니까. 그가 행복하다면 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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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답니다]


나는 그 문자를 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옥죄는 것 같아 목도리를 더 꼼꼼하게 여민다. 그 문장에 주어가 생략된 건 아마 쿠로코의 배려일테다. 아, 정말 나의 상상대로 되는구나. 이제 아이를 낳고 넌 행복하겠구나. 눈을 깜빡였다. 추위에 손 끝이 얼얼하다. 이대로 있다간 온몸이 얼 것 같아 걸음을 빨리해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나는 찬 기운이 들러붙은 옷을 벗고 실내복을 입었다. 몸을 데우기 위해 따뜻한 우유를 한 컵 마시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의 결혼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많이 피곤했고, 많이 추웠다. 나는 몸을 좀 더 웅크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변은 온통 하얀색뿐이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 흰 세상 한가운데 서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은 눈송이 마저 숨을 죽이고 내려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발을 내딛어 앞으로 걷자 눈을 밟는 발소리가 크게 들려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세이쥬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였다. 그는 여름축제 때의 유카타를 입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얼어있는 내 손 끝을 어루만진다. 나랑 같이 갈래? 나는 그의 뒷편에 펼쳐진 뜨거운 여름을 바라보았다. 내가 멍하게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눈을 가린다. 그럼 이건 어때? 그의 손이 떨어지자 벛꽃잎이 흘날리는 봄과 단풍이 진 가을이 보인다. 그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가, 세이. 그가 나에게 손을 뻗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그 뜨거운 손바닥에 입술을 맞추었다. '같이 가지 않아'




"왜?"




네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내가 있으면 넌 행복하지 않아. 그는 잔뜩 걱정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추운 길을 혼자 걸어가야하는데?"




나는 그에게 내가 할수있는 최대한의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나의 미소를 보더니 어쩔수 없다는듯이 웃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 그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마지막에 그는 뒤를 돌아 날 보더니 내가 그에게 반할수 밖에 었던 그 웃음을 짓는다. 안녕, 세이.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넓게 펼쳐진 눈밭에 다시 발을 디딘다. 하늘은 짙은 어둠이 깔려 달이 빛나고 있었다. 한발 한발 걸을때마다 그와의 추억이, 그의 미소가 스여지나가 점점 사라졌지만 나는 걸었다. 마냥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그의 모습 하나면 괜찮으니까.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쉬어야할지도 몰랐지만 그냥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를 잊고 살아가는 길이 이렇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얼어붙은 달밤을 끊임없이 혼자서 걸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