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ER님 (@iter_akafuri) 께 아이디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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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자명종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깬다. 시계의 머리를 눌러 진정시키고 몸을 짓누르는 이불을 걷어낸다. 침대에서 벗어나려는데 팔이 붙잡힌다. '어디가' 

 그러게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우리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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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커피를 들이마셨다. 커피 특유의 쓴 맛이 혀 전체을 감싼다. 컵을 내려놓고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들었다. 결혼. 아버지는 미련이 남는지 계속 맞선 상대를 찾아오셨다. 전에 분명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건만. 나는 손에 든 종이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예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도, 남자도 수십번이나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결혼은 생각이 없었다. 따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애초에 결혼에 회의적이었다. 그런 비생산적인 행위를 해서 뭐하나. 물론 내년이면 서른인 내가 걱정되는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아버지의 바람을 이뤄줄 필요는 없었다.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시라 해"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네, 테츠야. 조금 나이든 얼굴이 옅게 웃는다. 나는 쿠로코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쿠로코는 소파에 앉았고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쿠로코는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새해선물입니다. 나는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보다 더 작은 부적주머니에 내가 웃는다. 누가 고른거야, 이거.




"딸아이가 아카시 삼촌에게 꼭 필요한거라며 고르더군요. 연애부적입니다"




나는 더 깊게 웃었다. 걘 너답지않게 정말 귀엽다니까. 쿠로코가 미소 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안의 지갑에 부적을 넣어두고 서랍을 열어 만년필이 담긴 상자를 꺼낸다. 나도 선물. 쿠로코가 만년필을 슥 훑더니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미도리마군과 같은 거군요. 나는 조금 놀라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그걸 용케 아네. 모델명이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선물 잘 받았다고 전해줘"


"네. 아, 오늘 저녁에 시간 있습니까? 간만에 아카시군과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나는 핸드폰의 일정을 확인했다. 아니, 없어. 그럼 이따가 저녁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응. 그럼. 쿠로코가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간다. 쿠로코가 나가고 난 후에 나는 소파에 늘어지게 등을 기대었다. 연애운이라. 나는 쓰레기통에 버렸던 서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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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나 나나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지라 조용한 식당을 선택했다. 허름한 골목에 있는 작은 가정식 식당이었지만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저녁을 먹자던 약속은 예상치 못한 나의 일정으로 술 약속으로 바뀌었다.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계란말이를 집어 먹는다. 쿠로코는 멍하게 술잔만 바라보더니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듯 잔을 들어 한번에 들이 마신다.




"아카시군"


"응"


"돌아왔습니다"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생략된 주어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최근에 어디 멀리 간 지인이 있었던가. 키세는 워낙 국내외를 오가는 녀석이라 쿠로코가 저렇게 말할리가 없었다. 아오미네는, 공무원이 휴가철도 지났는데 멀리 갈리가 없고.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귀국한지 꽤 됐다. 작년에 돌아왔으니까. 무라사키바라인가. 그러고보니 무라사키바라와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후리하타군 말입니다"




아. 나는 그제서야 쿠로코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딱히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러고보니 결혼하고나서 외국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왜 돌아왔대? 나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쿠로코가 한숨을 쉰다. 괜히 긴장했네요. 나는 웃었다.




"이혼했대요"


"자세히 알고있네"


"지금 저희 집에서 지내고 있으니까요"




그거 꽤 실례인데. 아내가 입이 늘었다고 면박주지않아? 내 농담에도 쿠로코는 웃지않았다. 네, 집사람이 너무 구박해서요. 아카시군이 후리하타군 좀 한동안 맡아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술을 마시려다말고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후리하타군이 집을 구할 때까지면 됩니다. 제가 잘 말해둘게요. 조금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몰랐다. 나는 쿠로코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시 손을 움직여 잔 안에 남은 술을 단숨에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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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쓰면 돼. 미리 청소해뒀으니까 다시 할 필요는 없을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하네. 나는 방 안에 가방을 두는 그를 뒤로 하고 거실로 향했다. 몇년동안 나만의 공간이었던 곳이었는데 다시 누군가가 들어왔다. 거실에서 책을 볼까 고민하다가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자리를 잡는다. 표시해둔 부분을 펼쳐서 천천히 읽는데 첫번째 문장에서 더 읽히지 않는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 결국 나는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행복하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혼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오히려 더 불행해보였다. 생기있던 얼굴은 다 죽은 사람처럼 빛을 잃어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를 보니 샘솟는 걱정에 머리가 어지럽다. 무슨 마음으로 그를 이렇게 걱정하는걸까. 




"아카시"




문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방문을 열자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가 보인다. 저녁은 어떻게 할거야? 나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집에 먹을게 없는데, 나가서 먹자. 나는 몸을 돌려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었다. 그는 날 보더니 자신의 방으로 가서 외투를 입는다. 




"뭐 먹을래?"




아직도 스시 좋아해? 나는 그렇게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그 단어를 쓰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가까이에 있는 초밥집을 떠올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초밥집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여전하구나'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언제나 앞장서서 뭐해줄께 가자라고 말하는거"




내가 나의 과거를 되새기는 사이 그가 먼저 앞서 걸어간다. 문득 그의 뒷모습이 설레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의 옆에 가서 나란히 걷는다. 괜히 주머니에 있는 손을 빼내서 그의 손을 잡고싶었다.




저녁식사를 한 후에 먹을거리를 사왔다. 냉장고에 정리해두고 맥주와 안주를 꺼내와 거실에 풀었다. 분명 그가 집에 막 도착했을때만 해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깟 밥 한번 같이 먹었다고 이렇게 술까지 먹는다. 같이 지낸 시간보다 떨어져있던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다시 이만큼의 사이가 될 수 있을정도로 우리가 가까웠던가. 나는 맥주캔을 집어들었다.


시덥잖은 이야기만 오갔다.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에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업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는 결혼 후 떠난 미국에서의 생활과 아내에 관련된 이야기. 처음 영어를 잘 하지못해 겪었던 당혹스러움이 그에게 큰 추억인지 대화의 반이 그에 관련된 일화로 가득찼다. 나는 가만히 들떠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한참 자신의 얘기를 하더니 내가 말이 없자 그가 나를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그는 말이 없다. 이럴때 뭐라고 말해야할까. 나는 그의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미국에 게이가 많더라"




그렇겠지. 그래? 그런데? 그건 또 왜. 아까부터 그의 말에 대답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맥주를 들이마셨다.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흘렀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로 맥주캔 입구를 만지작거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뭐라도 하려는데 그가 입을 연다.




"무서웠는데, 그래서 도망쳤는데. 도망친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더 무서운거야"


"..."


"나는 그저 새로운 곳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생각하고 넘겼거든"




그러다보니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더 무서웠어. 주변은 더 익숙해지는데 길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은 더 강해져서. 그가 목이 타는지 술을 한모금 마신다. 나는 그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랐고, 그의 얘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몰라서 그가 그만 말하기를 바랐다.




"어느순간 내가 길을 잃은게 아니라 잘못된 목적지로 가고 있던 걸 알았어. 있지도 않은 목적지를 바라보며 거기가 길이라 생각하고 걸었던거지"


"...그래서?"


"이혼했어"




손가락 끝까지 굳는 것 같아 맥주캔을 내려놓고 손을 주물렀다. 일부러 아프도록 손가락 마디마디를 꾹꾹 눌렀다.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무서운게 전부 사라지더라. 아, 전부는 아니다. 반은 남아있으니까' 대체 뭐가 무서웠던걸까. 분명 내가 널 놓으면 다 잘될거라 생각했는데, 뭐가 널 그렇게 힘들게한거야. 당장이라도 그의 웅크린 어깨를 끌어안고싶어 나는 입 안의 여린살을 씹었다.




"미안해"




그냥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어. 다른게 아니라 이 말.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외치고싶었다, 넌 정말 그것만으로도 되는 그 정도의 감정만 남아있는거냐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반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나는, 이렇게, 널.




"아카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술을 많이 마셨나봐' 그의 걱정어린 시선이 부담스럽다. 대충 자리를 정리할까 생각하는데 그의 차가운 손이 뺨을 감싼다. 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숨을 멈추었다. 내 살갗에 와닿는 그의 손길이 너무 아득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감쌌다. 느껴진다, 그가.




"이기적인 거 아는데"


"..응"


"세이쥬로는... 나없이 잘 살았어?"




세이쥬로. 아카시 세이쥬로. 세이쥬로는 내 이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젖은 그의 목소리, 그리고 젖은 내 뺨. 그가 조심스럽게 나의 눈물을 닦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닦아주지말고 안아줘' 그의 품에 안긴다. 그의 어깨가 축축해지도록 나는 그의 품속에 있었다. 나는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기적이지 않아"




그가 움찔거린다. 나도 내 옆에서 힘들어 할 너를 볼까봐 그게 무서워서 네 행복이라는 변명으로 널 놓아준거니까, 놓친거니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지금에서는 필요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욱 더 겁쟁이라 나약한 나의 모습을 그에게 드러낼수가 없었다. 나는 미련하게 목적지가 없는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걸었다. 등 뒤에 행복한 너가 있다고 믿고 뒤돌아 보는 걸 두려워하며 걸었다. 멈추는걸 무서워했다. 멈추면 모든게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나의 존재마저도. 오히려 도망친 건 나였다. 

 '나도'




"붙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닦는다. '왜 나는 닦아줘' 나는 작게 웃고 그의 머리를 감싸안아 나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돌아왔던걸까. 너는 다른 곳을 보며 걸었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는채로 걸었다. 너가 방황하는 걸 보지 않았던 나와, 내가 도망치는 걸 보지 못했던 너. 서로 멀어지고 멀어져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품에서 빠져나와 나를 바라본다. 붉은 눈가를 쓰다듬자 그가 눈꼬리를 접어 웃는다. 나는 그의 뺨을 그러쥐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스시 좋아해?"




그가 푸스스 웃는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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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