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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 몰려있고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번화가를 쭉 따라내려오다가 조금 한적해질쯤 한 가게 옆의 화려한 그라피티가 되어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공터 반대쪽의 수풀 사이로 나가 시멘트 계단을 내려가면 또 처음 봤던 거리와는 다른 느낌의 거리가 나온다. 그 곳은 흔히 뒷골목이라고 불린다. 언더문화의 집합소. 클럽과 피어싱과 문신과 술집과 기타 등등. 들리는 소문으로는 불법적인 물건들도 거래된다고도 한다. 수많은 가게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가게는 한 타투이스트의 샵. 이 거리에서 드물게 일반인 손님도 찾아오는 곳이었다. 타투샵 드레스로사.


가게의 문이 열린다. 열자마자 보이는 카운터에서 금발의 여자가 밝게 웃는다.




"어서오세요. 예약하셨나요?"


"아니.. 안했는데"


"조금 기다리셔야 하실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 온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홀의 소파로 안내한다. 소파 앞의 테이블에는 갖가지 문신 카탈로그가 그려진 책자들이 널려있다. 죄송해요, 전 손님이 하실 모양 정하느라. 여자가 책자를 정리하자 손님은 미소로 답례를 한다. 하실 문신은 정하셨나요. 여자의 말에 손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번 봐도 될까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미리 인쇄해둔 문신을 꺼내든다. 여자는 남자의 사진을 보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손님 죄송한데..."


"그 문신으로 할거면 딴데가봐"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여자와 손님이 고개를 든다. 짙은 선팅의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작업실 문턱에 기대어 있다. 손님이 당황한듯 따진다. 그러자 남자는 손님 가까이로 다가와 종이를 빼앗아든다. 다시 한번 천천히 살피더니 종이를 남자에게 돌려준다.




"문신도 마음에 안 들고, 당신이랑도 안 어울려"


"아니 손님한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는 손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야. 내 맘대로 하는게 싫다면 다른 가게 가라고"




남자의 말에 손님의 얼굴이 붉어져서는 가게 밖으로 나가버린다. 여자가 손님의 뒷모습을 보더니 남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앞선 손님은요. 지금 옷 입고 있어, 그 사람은 돈 안 받아도 돼.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련님"


"왜?"


"직접 그린 도안으로 문신 한 것도 아닌데 왜 안 받아요?"


"내 마음이야"




남자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그냥 카탈로그북에서 딱인게 생각났었어. 남자는 말을 마치고는 기지개를 핀다. 방금 손님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데 오늘은 가게 일찍 닫자. 남자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의 입구로 가 'CLOSE'라는 팻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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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히루루크"


"또 그 대병원 얘기를 하러 온거냐"




닥터는 자신의 책상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닥터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는다. 청년은 닥터의 책상에 손을 짚고 다시 입을 연다. 그 대기업 병원에 인맥도 있다면서, 찔러달라구. 청년의 말에도 닥터는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않으며 고개를 젓는다. 닥터의 반응에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소파로 가 앉는다. 청년이 한발짝 물러선듯 하자 닥터가 웃는다. 




"이제 3학년이 아니냐. 뭘 그리 조급해해"


"그래도"


"수석인 주제에 욕심도 많군"


"욕심이 많아서 수석인거야"




청년의 말에 닥터가 큰소리로 웃는다. 그게 정답이군. 청년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소파에 눕는다. 닥터는 다시 펜을 들어 책상위의 자료들에 체크를 한다. 청년은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책 중 하나를 들어 읽는다. 한의학 논문집. 청년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책을 펴 읽는다. 어느정도 읽다가 책을 내려둔다.




"그러고보니 닥터"


"왜 그러냐"


"얼마전에 닥터 쿠레하의 논문을 봤는데 꽤 흥미롭더라고"




닥터가 고개를 들어 청년을 본다. 흥미롭게 웃으며 턱을 괸다. 그래 어떤 내용이던. 닥터의 질문에 청년이 고민하는 듯 턱 밑의 수염을 만지작 거린다. 닥터는 청년의 말이 무척 흥미로웠다. 자신의 동료인 쿠레하는 논문이 방대하고 어렵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물론 내용은 언제나 새롭고 놀라웠지만. 과수석인 청년은 그 논문을 과연 이해했을까 조금 기대하며 청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생각이 난 듯 청년이 입을 연다.




"민간요법에 대한 거였잖아. 좀 더 체계화 시키고 정말 효력이 있는 것들을 추려놓았고"


"흐음. 내 기억으로는 그게 아니었는데?"


"지금 나 무시하는건가?"




청년이 몸을 일으켜 닥터를 쳐다본다. 닥터는 난감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무시하는거 아닌데. 청년이 다시 소파에 눕는다. 이 내용 맞다니까 나 어리다고 무시하는거 아니야, 어려도 당신만큼 똑똑하다고. 청년의 거들먹거림에 닥터가 웃는다. 건방진 꼬마. 그렇게 생각하며 닥터가 다시 자료에 눈을 두는데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 기억으로는 고통치료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닥터. 눈이 안 좋아졌나봐 글도 잘 못 읽고"


"그럼 내기할까?"




닥터의 말에 청년이 벌떡 일어난다. 순식간에 닥터의 책상 앞까지 다가와서는 눈을 빛낸다. 좋아, 내기하지. 청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닥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네가 이기면 이제부터 내 수업은 다 에이플러스에 그 대병원에 널 추천해주지. 닥터의 말에 청년이 기뻐한다. 이미 내기에서 이긴 것 마냥 기세등등해하며 자신의 가방 안을 뒤적인다. 닥터 쿠레하의 논문집을 꺼내더니 천천히 읽어내린다. 읽으면 읽을수록 청년의 얼굴이 구겨진다.




"말했지않나 고통치료에 대한 내용이라고"




닥터의 말에 청년이 이마를 짚는다. 거만하게 굴었다가 된통 당했다. 청년은 죽을 상을 하며 닥터를 바라본다. 그래 내가 졌어, 뭘하면 되지? 닥터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막지 않았다. 방금 자신에게 망언을 뱉은 꼬마를 절망에 빠지게 할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닥터는 손을 깍지끼고 턱을 괴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하지 않으면 교수들 포섭해서 네 모든 과목을 낙제로 만들어버릴거다. 청년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거린다.




"손가락에 문신해라. DEATH 이 문구로"


"뭐?!"




예상대로 청년의 반응은 격했다. 청년은 닥터의 책상에 매달려 말을 뱉어냈다. 의사인데 손에 문신이라니. 아니 거기다가 의사인데 죽음이라니. 닥터 지금 정신이 좀 이상한거 아니야? 내 인생 망치려고 그러는거야? 닥터! 웃지만 말고 대답 좀 해봐. 청년의 좌절감 어린 말에 닥터가 귀찮은듯 손을 휘젓는다. 그러게 미리미리 노인공경 좀 하던가, 자업자득이야. 청년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나는 망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하면 전과목 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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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가득찬다. 그 웃음소리를 내는 남자의 입을 청년이 틀어막는다. 조용히해 멍청아. 남자는 웃음을 참기 힘든지 억눌린 소리로 웃는다. 청년은 속에 열이 나는 것 같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얼음째 마셨다. 전투적으로 얼음을 깨며 먹고 있으니 남자가 겨우 입을 연다.




"건방떨었다가 아주 나락으로 떨어졌군"


"닥쳐"




청년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청년을 바라본다. 난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교수들한테는 잘한다고. 청년은 대답 대신 얼음만 씹을뿐이었다. 청년은 남자의 타는듯한 붉은머리를 다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도 그 교수가 문신해도 의사는 할 수 있게 병원 하나 찔러주겠다 했다며.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번째 아이스초코를 빨아 마셨다.




"아예 의사 인생 끝난 건 아니잖아. 기운내라고"


"거긴 ER이란말이야"


"ER이 뭔데"




남자의 질문에도 청년은 고개를 숙인채로 말이 없다. 미친놈이 왜이렇게 지랄맞게 굴어.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청년을 툭툭 쳤다. ER이 뭐냐고. 그게 뭔데. 말했으면 가르쳐줘야 할 거 아냐. 뭐야 뭔데 뭐냐고 뭡니까 말하라고 이 미친...




"응급실!!!!!!!!"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고 청년이 소리친다. 남자는 놀라 벌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소리 지른 후부터 다시 입이 트였는지 청년이 말을 쏟아낸다. 문신 그게 얼마나 비위생적인데, 더군다나 몸에 안 좋으면? 이상하게 되면 어쩌고. 어떻게 그 사람을 믿고 내 살갗을 맡기냐고.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러고는 테이블에 엎드려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는다. 남자는 머리를 긁더니 이내 아이스초코를 털어 마신다. 얼음을 씹던 중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듯 탄성을 지르며 청년을 흔든다. 야, 야, 야.




"내가 잘하는 곳 소개시켜줄까?"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