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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입맛을 다셨다. 남자 주제에 장미꽃다발에 감동받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렇게 세세한 것에 감동한다면 잡아 먹는건 식은죽 먹기였다. 예쁘게 생기지도 그렇다고 요염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클럽이나 바에서 만난 것도 아니다. 후리하타 코우키. 그는 그저 평범한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였다. 아카시가 후리하타를 만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였다. 분명 기독교는 동성애를 좋게 보지않는다. 아카시는 교회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그의 친구 모모이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후리하타를 만났다. 한번에 알아봤다. 분위기가 그랬다. 저렇게 티를 내면 어쩌나 혀를 차며 다가갔다. 예상대로 후리하타는 게이였다. 참회, 속죄 그 따위의 말을 꺼내는 모습이 아카시는 아니꼬웠다. 착한척 하고 있네. 아카시는 이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하나님을 운운하는 남자를 더럽히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남자한테 장미꽃 받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카시가 머뭇거리며 소심하게 말하는 후리하타의 뺨을 쓸었다. 요즘은 많이 개방적이여져서 괜찮아. 그제서야 안심하며 후리하타가 웃는다. 멍청한 사람. 아카시는 눈 앞의 이 남자가 자신의 꼬임에 넘어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싶었다. 자신이 이브에게 선악과를 권하는 뱀이 되고 싶었다. 그것만큼 재미있는것도 없지. 다시 입맛을 다셨다.



두사람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만남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아카시는 그저 얼굴이 보고싶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상 데이트였다.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두사람은 한적한 공원을 걷고있었다. 아카시는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옆에 있는 후리하타를 바라보았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사준 옷이 퍽 마음에 드는지 손가락 끝으로 옷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제 익숙해질때도 됐을텐데 후리하타는 매번 아카시에게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고마워하고 미안해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훑었다. 모두 자신이 사준 것이었다. 아카시는 심리적인 공세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공세까지 퍼부었다.

"옷 마음에 들어?"
"아, 네"

후리하타의 미소에 아카시가 답하듯 웃었다. 주변은 석양으로 인해 붉었다. 꽤 로맨틱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아카시는 슬쩍 후리하타의 손을 잡았다. 후리하타는 눈에 띄게 움찔거렸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거의 넘어왔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두사람은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맞닿은 온기에 설렘이 있었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후리하타가 전시회를 연다. 아카시는 전시회 마지막날쯤에나 시간을 냈다. 사진에 흥미는 없었지만 자신이 후리하타의 표면상 친구이기도 했고 나름 후원자였기에 전시회는 가야했다. 아카시는 캘린더를 훑으면서 인상을 썼다. 후리하타와 만난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이라니. 아카시는 붉은펜을 들어 후리하타의 전시회 마지막날에 동그라미를 마구잡이로 그렸다. 슬슬 때가 되었다. 손잡는 것, 포옹 간단한 것은 다 나갔다. 이제 좀 더 짙은걸 나가야지. 아니 질리니까 한번에 다 빼고 버려야지.

"여보세요"
"응, 코우키"
"마지막날쯤에나 갈수있을 것 같아"
"고맙긴
"마지막이니까 술이라도 마실래?"

아카시는 웃었다.


전시회는 평범했다. 아카시는 예의껏 사진들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온 것에 꽤 들떠있어 보였다. 전시회가 끝날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두사람은 아카시의 집으로 향했다. 아카시나 후리하타나 사람많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술 마실 장소를 그곳으로 정했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꺼내오는 양주와 샴페인에 역시나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미안해했다. 아카시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듣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곧 그 입술에서는 저주의 말이 쏟아지겠지.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술잔을 건넸다.

"전시회 잘봤어"
"다 세이쥬로씨 덕분이에요"

몇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후리하타는 평소보다 더 많이 방긋거리며 웃었다. 조금 말수도 많아진 것 같았다. 아카시는 가만히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자신의 밑에서 수치심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채 신음을 흘리는 후리하타를 떠올렸다. 조금 분위기가 후끈해지자 아카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후리하타를 바라보았다.

"코우키씨는 연애한적 있어? 남자랑"
"당연히 있죠, 하지만 그 땐 너무 어렸고 어리석었어요"
"흐음, 그립진않아? 애정이나 그런거"

후리하타가 곤란하게 웃었다. 아카시는 그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당연히 애정이 고프겠지. 여자로는 채워지지 않을 욕망이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끌어당겼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후리하타는 많이 놀랐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다시 느끼게 해줄게"

아카시는 쉽게 그의 입술에 접근했다. 살짝 벌어져있는 입술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혀를 얽자 후리하타의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뒷목을 잡고 좀 더 깊게 혀를 섞었다. 키스가 농염해지고 후리하타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할 때 갑자기 단조로운 벨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후리하타의 벨소리였다. 후리하타는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아카시를 밀어냈다.

"전화 받지마"
"아..안돼요"

아카시는 짜증이 치밀었다. 한참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초를 친다. 저 멍청한 성격 때문에. 후리하타는 결국 핸드폰을 찾아 현관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는다. 몇마디 주고받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아카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예상이 가 마른세수를 했다.

"일 생긴거지? 가봐"
"저..기, 미안해요"
"됐으니까 가"

후리하타는 머뭇거리는듯 하더니 짐을 챙겨서 집을 나갔다. 아카시는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해져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제 어떻게 다시 공략을 하나. 길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막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후리하타와 만날 일이 없었다. 후리하타는 전시회 정리로 바빴고 아카시 또한 전시회로 벌어들인 약간의 수익을 처리하는데 바빴다. 그리고 시간이 좀 남을쯤 아카시는 발신지가 적히지 않은 편지를 받았다. 비록 제 이름밖에 안 적혀있었지만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보낸 편지라는걸 어렴풋이 느꼈다.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자 정갈한 글씨가 보인다.

이렇게 편지를 통해서 얘기하게 되어서 일단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해야할 말이 있었어요. 차마 말로는 못하겠는데 확실히 말은 해야할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로 씁니다. 이런 저를 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세이쥬로씨가 더 이상 제게 전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신은 그저 심심해서 재미삼아 전화했는지 몰라도 전 당신의 전화때문에 어쩔 줄 몰라 애태운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느순간부터 세이쥬로씨의 전화를 기다리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땐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곤란할 뿐이에요. 사실 당신이 제게 어느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진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까지 주신 선물들, 장미나 샴페인 전부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드릴수는 없어요. 당신이 위험한 사람인 걸 전 한눈에 알아봤으니까요. 그러니까 다신 키스한다거나 손을 잡는다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정말 당신 때문에 곤란한 일 투성이입니다. 저는 여기서 저희 둘의 인연을 끝냈으면 합니다.
편지는 이만 줄입니다. 돌려 말할 법도 한데 굳이 직설적으로 말한 이유는 그만큼 세이쥬로씨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이때까지 함께했던 일들은 좋은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두겠습니다. 그럼 건강하세요.

아카시는 편지를 구겼다. 생각지고 못한 전개였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새끼강아지인줄 알았더니 호랑이새끼였다. 아카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더욱 더 소유욕이 생긴다, 정복욕이 들끓었다. 더럽히는 걸 넘어서 굴복시키고 싶었다. 아카시는 아직은 새끼인 그를 자신의 애완견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그 카타르시스가 아카시를 흥분시켰다.



후리하타는 미소지었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책의 페이지는 시간이 가도 넘어가지를 않았다. 결국 책을 덮는다. 후리하타는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언제쯤 올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한다. '만나서 얘기하자' 후리하타의 미소가 짙어졌다. '편지보셨잖아요' 금방 답장이 온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제대로 얘기할 수 있게 해줘' 핸드폰을 그대로 테이블에 던졌다. 답장이 오기 전까지 초조해하겠지. 후리하타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이런게 후리하카는 너무 재미있었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게임. 싫은 척,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아카시는 바보같아서 몰랐겠지만 후리는 은근슬쩍 아카시가 자신에게 빠져들만한 장치를 심어두었다. 은밀한 유혹의 기술. 후리하타의 것은 절대로 어줍잖지 않았다. 후리하타는 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올렸다. 두근두근. 마음이 뛰고 있다. 다시 핸드폰을 들어 답장을 한다. '그럼 딱한번만이에요' 기다렸다는듯 딱 두글자의 문자가 날아온다. '그래' 후리하타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화면를 톡톡 두드렸다. 얼마나 더 당신을 즐겨볼까. 아카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후리하타는 더 많은 걸 원했다. 후리하타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시와 만날 장소를 정해야지.



약속장소를 보낸지 한시간도 안되어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아카시는 조금 초조한듯 했다. 후리하타는 모르는척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가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널 좋아해, 진심이야"
"하지만 전,"
"제발 내 마음을 거부하지 말아줘"

후리하타는 애절하게 말하는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조금 머뭇거리는 척했다. 아카시가 희망을 가질수 있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도저히 안되겠어요. 아카시의 얼굴에 좌절감이 비친다. 후리하타는 들키지 않게 웃었다. 그리고 잔뜩 울상을 지어보였다.

"근데... 세이쥬로씨가 없어도 안되겠어요"

아카시가 놀란듯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잘할게. 희망에 가득차 자신의 손을 잡는 아카시를 보며 후리하타는 환하게 미소지었다. 당신은 위험한 게임 속에 모르는 새 빠져들었고 그러니 날 더 즐겁게 해 주세요.

"잘부탁드려요, 세이쥬로씨"

날 향한 뜨거운 마음을 보여 주세요.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