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궁/하야미야] 회귀

2013. 10. 6. 23:18 from KB/짧은글

엽궁합작에 참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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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났다. 하야마는 기지개를 켰다. 며칠을 투자했던 번역이 끝났다. 어쭙잖은 스페인어 실력으로 대학에, 밥벌이까지 하게 될 줄 몰랐던지라 하야마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쩌다가 스페인어를 했더라. 과거를 되짚어 가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간다. 


 '미야지씨.'


하야마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래 생각났다. 막 대학교에 들어갔던 그에게 진로를 못 정하겠다고 칭얼거렸다. 그는 무심하게 네 별 볼일 없는 스페인어로 가든가라고 말을 던졌다. 그랬다. 하야마는 부엌으로 가 물을 한잔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간다. 그 느낌에 무언가 끓어오르려던 것이 잠든다. 하야마는 거실의 소파에 벌렁 누웠다. 피곤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느라 눈이 아팠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자 눈물이 절로 고인다. 하야마는 숨을 크게 뱉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미야지와는 얼마 전에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사소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무척 사소했다. 주말에 영화 보러가자는 권유를 미야지가 거절했고 그로 인해 말다툼이 있었다가, 그러다가 헤어졌다. 처음 말다툼은 사소했다. 왜 이번 주말도 바쁘냐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당신은 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라는 말로 끝났다. 정적이 흘렀고 하야마는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 견딜 수 없었는가. 그것이 진짜 이유였다. 미야지는 원래 성격상 무심한 사람이었다. 하야마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귀찮은 것도 싫어하는지라 하야마가 무언가를 권유하면 곧 잘 거절하고는 했다. 역시나 그걸 걸고넘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지내온 주제에 그날은 왜 그랬느냐면, 보았기 때문이다. 미야지가 여자와 데이트 하는 것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데이트를 권했고 미야지는 거절했다. 하야마는 어쩔 수 없지 라며 포기했지만 시내는 꼭 나가야했던지라 혼자서 나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자와 웃고 있는 미야지를 발견했다. 아니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연히 여자와 있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니라는 믿음은 빛을 잃어갔다. 그가 선을 보러 다니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사랑했기에 옅은 빛만으로 하야마는 미야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트를 거절당한 그날은 견딜 수가 없었다.


키요시는 내가 질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신이 남자와 연애한다는 것이 부끄러운걸까. 그는 자신의 옆에 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여자를 소개 받은 걸지도 몰랐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비켜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자신은 아직도 미야지를 사랑했지만 미야지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이유든지간에 일단 자신은 미야지에게 버림받은 것이었다. 비참하게 매달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야마는 눈이 너무 따가워 아예 감아버렸다.




 온통 까만 공간이었다. 귓가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하나둘씩 파고들더니 이내 한 데 모여 머리가 울릴 정도로 웅웅거렸다. 시끄러워. 하야마는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전혀 모르는 공간이었다. 분명 저는 거실의 소파에서 잠에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여러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앉아서 웃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있는걸까. 하야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키요시"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당장 그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 웃고 있는 두 사람. 하야마는 걸음을 멈추었다. 키요시, 이러지마. 정말 내가 싫어진거야? 하야마는 자신을 전혀 보지 않는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무너진다. 하야마는 손을 뻗었다. 어어? 미야지를 통과해버리는 손을 보며 하야마는 뒤로 물러났다. 손을 쥐었다 폈다. 여기는 현실이 아닌 걸까. 하야마는 다시 한 번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현실이건, 현실이 아니건 지금 이 모습이 자신과 헤어진 현재가 아니길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미야지와 그 여자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소개로 만난 듯 했는데 하야마는 미야지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하야마는 미야지의 미묘한 표정 변화로도 그의 기분을 알 수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럼 뭐해. 헤어졌는데, 버림받았는데. 하야마는 짜증에 발을 굴렀다. 미야지는 여자를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야마는 미야지를 계속 쫓아다녔다. 말없이 걷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가 문득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 조금 빠르게 걸어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다 본채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하야마는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하야마 코타로'


하야마는 반듯하게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에 입을 벌렸다. 에, 나? 하야마는 다시 미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야지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야마는 멍하게 있다가 앞서 걸어가는 미야지의 보폭에 나란히 맞추어 걸었다. 키요시, 나 생각한 거야? 저 여자보다 내가 훨씬 좋은 거지? 응? 키요시? 아무리 말해도 그에게 들리지 않을걸 알지만 하야마는 그러고 싶었다. 입이 아플 정도로, 혀가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물어보고 싶었다. 무서워서 언젠가부터 묻지 못했던 그 질문. 


"키요시, 나 좋아해?"


미야지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야마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듯 했다. 왜 멈췄을까,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하야마는 긴장한 채로 미야지를 보았다. 미야지는 멈춰 서선 얼굴을 쓸었다. 고민이 있는 듯 괴로워 보이는 얼굴에 하야마의 꽉 쥔 손에는 땀이 찬다. 숨을 멈춘다. 그의 입술이 열릴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코타로"


잔뜩 모여 있던 숨이 터지듯 빠져나간다. 허무함. 하야마는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눈을 꾹 감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함이 잔뜩 묻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계속 감고 있었다. 끝없는 어둠이 펼쳐지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구토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하야마는 미야지의 집 거실에 서있었다. 언젠가 스쳐지나가듯 본 그의 가족들이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키요시는?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던 그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나간다. 하야마는 멀찍이서 그녀의 어머니와 막 들어온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아까와 다른 옷, 하지만 언젠가 봤던 옷. 하야마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과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때, 이번에는 좀 괜찮니?"

"그냥 그랬어요"


또 선을 본걸까. 하야마는 지친 듯 걸어가는 미야지를 보았다. 가족들이 미야지에게 한마디씩 던진다. 괜찮았어? 이번엔 마음이 들던? 미야지는 그들을 보지도 않은 채 단 한마디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별로였어' 하야마는 굳게 닫힌 미야지의 방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 걱정이 되었다. 헤어졌어도, 아직 사랑하니까. 방에 들어가 볼까 생각하는데 가족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게이도 치료가능하다 했어. 우리 교회에서 고칠 수 있대. 하야마는 놀라며 그의 가족들을 보았다. 커밍아웃이라도 했던 거야? 아니면 아웃팅 당했나? 하야마는 급하게 미야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울고 있을까. 알게 모르게 눈물이 많던 그였으니까.


예상과 다르게 미야지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족들이 밖에서 다 들리도록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흥 없이. 하야마는 기운이 빠졌다. 더 이상 기대할 마음이 사라졌다. 혹시나 그가 자신을 아직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 어쭙잖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전부 배신당했다. 하야마는 쓰러지듯 그의 침대에 등을 기대었다. 있지, 키요시. 지금 당장 뭐해? 마음에 드는 여자는 찾았어?




하야마는 이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현재로부터의 회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도 모호하기에 하야마는 이것을 회귀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잠들기 직전 번역했던 것이 회귀라는 제목의 과거에 다녀온 남자가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하고 새 삶을 사는 내용인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하야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나도 이 회귀가 끝나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새 삶에는 미야지가 없는 걸까. 그러나 이내 미도리마의 목소리에 생각은 수면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더 생각해봤자 좋을 것 같지 않기에 가라앉도록 내버려둔다.


"술은 몸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알아, 의사라고 잔소리냐? 트럭으로 쳐버린다 너"


요즘 술을 자주 마시니까 하는 말입니다. 미도리마의 말에 미야지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다. 신경 꺼. 하야마는 미야지 옆의 바 스툴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들었다. 이쯤에 우리가 어땠더라, 그렇게 생각하다 가늠이 되지 않아 관두었다. 미야지는 술 한 잔을 그대로 원샷했다. 미도리마는 말없이 미야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 때문에 힘들면 하야마씨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미도리마의 말에 하야마는 고개를 살짝 틀어 미야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힘들면 얘기하면 될 거였다.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했던 걸까. 왜 모든 걸 숨기고 혼자서 앓았던 걸까. 아무리 고민 해봐도 '사실 마음 한구석에 자신의 연애가 비정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라는 답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이 오해를 풀어줄까 싶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됐어, 걔가 뭘 안다고. 나 혼자 할 수 있어"


그럼 그렇지. 하야마는 눈을 감았다. 이제 또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면 그 곳으로 갈 것이고 아니라면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들리겠지. 기분이 조금 울적해 하야마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머리보다 입에 익은 노래였는데 미야지가 좋아했던 아이돌의 히트곡이었다. 될 대로 돼라. 하야마는 더 또박또박 멜로디를 씹으며 허밍을 했다. 노래가 2절 후렴에 머무를 즈음 뺨에 닿는 바람이 달라진다. 이번엔 또 어디일까, 눈을 떴다.


눈앞에는 도쿄에서도 꽤 큰 병원이 있었다. 평일 낮인지 주변은 꽤 한산했고 주차장엔 차가 거의 없었다. 하야마는 병원으로 들어가 볼까 해서 정문을 찾아 걸었다.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걸까. 정문을 찾지 못해 해매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미야지의 목소리에 하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따라 가봤더니 그는 그의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처참한 표정으로 미야지를 보고 있었고, 미야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야마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동성애 그거 치료할 수 있대. 정신과 상담하는 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그러니까 한번만 진료받자, 응?"

"지금까지 나 열심히 했잖아요. 그거 좀 봐주면 안돼요? 이렇게 고치려고만 하지 말고!"


미야지의 얼굴도 그의 어머니와 같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하야마는 묘한 기분이 들어 코를 찡긋거렸다. 동성애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미야지는 이를 혼자서 받아내고 있었다. 그럼 교회라도 엄마랑 같이 다니자. 그녀의 말에 미야지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저 일 있어서 이만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야마는 몸을 돌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그를 뒤따랐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따라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따라 들어온 곳은 전에 보았던 그 술집이었다. 미야지는 익숙하게 바에 앉아 술을 주문했다. 이렇게 술을 주문하는 걸 보니 일이 있다던 말은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둘러댄 것임이 분명했다. 하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왜 자신에게 기대지 않았을까. 못 미더워서일까. 끊임없이 속이 비었다가 다시 차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넋 놓고 술잔만 보고 있다가 미야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듯해 옆으로 다가가 통화를 유심히 듣는다. 키요시, 대낮부터 술 마셔? 톡톡 튀는 억양. 자신이었다. 하야마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이 생각나 심장이 뛰었다. 분명,


"귀찮게, 그런 소리 할 거면 끊어"


처음으로 미야지와의 이별을 고려했던 날이었다. 한참 미야지가 선 보는 것을 알게 되고, 약속은 자꾸 어긋나고, 모처럼 용기 내어 했던 전화였는데 그렇게 만나기 힘들던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속상한 마음에 몇 마디 했더니 미야지는 저렇게 말하고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기자 핸드폰을 던져버렸었지. 하야마는 쓰게 웃었다. 지금에서야 미야지에게 어떤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땐 몰랐으니까. 사실 지금도 미안한 마음은 없다. 엇갈리는 감정이 씁쓸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이 커졌다. 미야지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야마는 만질 수 없는 미야지에게 손을 뻗었다. 현실에서나 여기서나 닿을 수 없는 건 똑같네.




실제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하야마는 현실의 자신이 백발노인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미야지는 가족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회귀의 끝이 어딘지를 모르니 마냥 붕 떠있는 느낌에 하야마가 몸을 잔뜩 늘어뜨렸다. 소파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용하던 부엌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자 그의 어머니가 오늘 있을 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야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부터 드는 의문은 왜 싫은걸 거절하지 않을까였다. 부모님이 저렇게 강요해도 본인이 싫다한다면 결국 포기할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왜 한 번도 제대로 거부하지 않는 걸까. 병원의 일은 그렇다 쳐도 그런 거부로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지 않을 텐데. 하야마는 그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키요시를 이해할 수 없어.


"오늘 상대는 소개처에서도 이런 사람이 없다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잘해봐, 알았지?"


하야마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는 미야지. 하야마가 아는, 미야지가 대답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귀찮거나 대답하기 싫거나. 거기서 거기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하야마는 지금 상황이 후자임을 알아차리곤 부엌으로 걸어갔다. 미야지의 얼굴이 거부감으로 굳어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답하기 싫을 때의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야마의 시야에 미야지가 들어왔을 때, 그는 입을 열었다.


"정말, 이 여자들 다 만나 봐도 안 되면"


슬픔, 비참, 좌절, 비통, 설움, 참담, 참혹, 애통, 처참, 비탄, 애수, 비감, 비애, 비수, 고통, 괴로움, 쓰라림, 고통. 그의 눈동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새로 가라앉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심연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읽혔다. 그 감정들은 하야마의 심장을 터트릴 듯 짓눌러왔다.


"인정해주세요, 저랑 그 녀석"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야마는 순간 힘이 풀리는 다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머릿속이 수많은 말들로 가득 찬다. 이내 말들은 얽히고설키어 까맣게 물들어 버린다. 인정, 사랑하는 사이. 이때까지의 일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언제나 뒤에서 챙겨주던 사람. 아닌 척, 덜렁거리던 자신의 뒤까지 확인해주며 끌어주던 미야지. 하야마는 언젠가 그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냥 그게 제일 아쉽지.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거. 우리 사랑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어느 기념일에 미야지가 했던 자신과의 연애에 아쉬운 게 있냐는 질문. 그에 대한 답. 돌이켜보면 그 기념일 이후로 서서히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치듯이 말했던 그 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가슴을 부여잡고 쉼 없이 기침을 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흉부를 자극한다. 키요시, 키요시. 하야마는 고개를 들어 미야지를 찾았다. 그는 이미 식사를 마쳤는지 부엌에는 없었다. 하야마는 불안해졌다. 키요시, 어디 있어.


"다녀올게요"


현관 쪽에서 들리는 미야지의 목소리에 급하게 달려 나간다. 익숙한 옷. 하야마의 심장은 저 아래로 추락했다. 안돼, 키요시. 가지마. 하야마는 미야지를 따라 나섰다. 하야마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미야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잡을 수 없는 미야지에게 계속 손을 뻗었다.


"가지마! 키요시 제발- 그대로 가면 안돼! 안된단 말이야! 키요시!!!"


목이 쉴 정도로 외치는 그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야지는 새로운 여자와 인사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가 미야지와 대화하다 환하게 웃더니 한 레스토랑을 가리킨다. 하야마는 이다음에 일어날 비극이 눈앞에 그려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사람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통유리로 된 벽면 쪽의 테이블에 앉는다. 길거리에서도 두 사람이 훤히 보이는 그 위치. 하야마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발, 오지마. 오더라도 보지마. 하지만 하야마는 이미 벌어진 일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바람이 소용이 없다는 것도.


햐야마 코타로는,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은 그 곳에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유리 너머의 미야지를 마라보고 있었다. 절망이 가득한 과거 자신의 표정을 보며 하야마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가 뒤를 돌아 가버린다. 하야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미야지가 전화를 받더니 여자에게 사과를 하고 급하게 레스토랑을 나온다. 하야마는 남겨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발악이었다. 눈을 감지않을테다. 수분이 바짝 말라버린 눈은 따가움을 호소했다. 하야마는 잔뜩 인상을 쓰며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내 저도 모르게 시야가 닫힌다. 눈꺼풀이 완전하게 내려앉자 올라오는 욕지기와 어지럼증에 머리가 깨질듯 아팠다. 급하게 눈을 뜨자 그 앞엔 자신과 미야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손을 잡은 채로.


과거의 자신은 평소와 같이 웃으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손을 꽉 잡은 채로 앞만 보며 얘기하느라 그 때 미야지의 표정은 보지 못했었다. 지금 이렇게 보게 된 미야지의 표정은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입술사이로 나오는 말은 불만 투성이였지만 나오는 말과는 정반대의 표정에 하야마는 이를 악 물었다. 왜 그때 용기내서 뒤돌아보지 않았을까. 하야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바보 같은 나. 이제야 알겠다. 이별의 결정적인, 진짜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미야지는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야지는 하야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보지 않은 하야마, 자기 자신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다.


"난 키요시가 너무 좋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하야마는 흐릿한 시야에 눈을 깜빡였다. 뺨이 축축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쓸었다. 다시 눈앞이 또렷하게 보이면서 미야지의 얼굴이,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물, 닦지 말걸.


"그래"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호선을 긋는 그의 입가가, 곱게 접힌 그의 눈꼬리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가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눈은 심장을 대신해서 투명한 피를 흘렸다. 후두둑. 박힌 파편이 너무 커 피가 뚝뚝 떨어진다.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상처주고 도망가 버려서 미안해. 행복하게 못해줄망정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해. 울음이 목구멍을 긁는다.


키요시, 주말에 영화 보러 가자. 

안돼. 

왜? 

일 있어. 

무슨 일? 

있어, 신경꺼. 

매주 바쁘네. 

그럴 일이 있어.  


하야마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둬, 제발. 얼른 이 꿈에서 보내줘. 손바닥을 꽉 눌러 귓구멍을 막아도 그 틈사이로 또렷하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왜 이번 주말도 바빠? 솔직히 나 피하는 거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 만나는 거 봤어. 어쩔 수가 없다니. 당신은 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정적. 무거운 정적. 두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리던 정적. 하야마는 귀를 막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줬다.


"헤어지자"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제발. 하야마는 눈을 감았다. 아주 세게 감았다. 그것도 모자라 귀를 막던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인위적인 어둠속에서 일부터 육십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었다. 하나, 둘, 셋-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천천히 눈을 뜨니 끝없는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꿈에서 깬 건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낫다며 자신을 달랜다. 걸을까, 앉을까, 누울까, 서있을까. 하야마는 눈을 깜빡였지만 짙게 깔린 암흑으로 인해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이 조금씩 사라질 쯤 옅은 울음소리가 하야마를 스쳤다. 


울음소리는 점점 또렷해져 하야마의 곁으로 다가왔다. 울음 사이로 억눌린 말들이 비집고 튀어나온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하야마는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단어에 어쩌지도 못한 채 불안하게 서있었다. 도대체 누굴까. 어디에 있는 걸까. 자신이 눈을 감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걸까. 하야마는 눈을 깜빡이려고 노력했다. 여전한 혼돈. 하야마는 허우적거렸다. 어디 있어? 누구야? 왜 그렇게 울고 있는 거야?


"혹시 키요시야?"


덜컹, 하고 세계가, 발 디딘 곳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걸까. 서 있는 건지, 떨어지는 건지. 눈을 감은건지, 뜬 건지. 말하고 있는 건인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 무엇도 알 수가 없다. 미안해, 미안해. 다시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 하야마는 귀를 기울였다. 네가 언제나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언제나 너에게 행복만을 주고 싶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나의 욕심으로 너는 더 힘들어했구나. 미안해. 


"미안하다, 코타로."


그 한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돌아온다. 손끝에서부터 시신경 끝까지. 하야마는 미야지의 뒤에 가만히 서있었고, 눈은 미야지의 떨리는 어깨에 가 있었으며, 목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듯 잠겨있었다. 눈을 깜빡였다. 계속 눈을 감았다 떠도 미야지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하야마는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뜨려는데 두려움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봐야해, 봐야한다. 미야지를 봐야한다. 그가 어떤 표정이든 똑바로 보고 느껴야해. 그를 제대로 보고 나를 제대로 말해 줘야해. 하야마는 눈을 떴다. 미야지는 울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울지마"

"당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해서"

"그래서 헤어지자 말했던,

이런 겁쟁이 때문에 울지마"

"미안해, 사랑해 키요시"




눈앞이 환해졌다.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에 하야마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소파위로 무언가가 투둑 떨어졌다. 베이지색 천이 작은 방울모양으로 짙게 물들었다. 하야마는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쓸었다. 손끝에 흥건하게 맺히는 눈물. 젖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그러다 문득 울고 있던 미야지가 떠올랐다. 하야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얀 벽지, 옅은 나무빛 바닥, 베이지색 소파. 자신의 집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시간에서 한시간이 좀 넘게 지나있었다. 여섯시 2분전. 곧 미야지의 퇴근시간이었다.


키요시를 봐야해.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들고 현관을 나섰다. 시간을 봐서는 서두르면 전철역쯤에서 만날 수 있을 듯 했다. 택시를 타고 그가 퇴근할 때마다 내리는 전철역의 이름을 불렀다. 가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를 하지만 그럴수록 실타래처럼 더욱 엉켜버린다. 택시가 멈췄을 때는 여섯시 반을 넘는 시간이었다. 아슬아슬한 시간대. 하야마는 달렸다. 숨이 찰 때까지 달리자 멀리서 걸어가는 미야지가 보였다. 산소가 부족해 흉부가 아파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키요시!!!"


미야지가 뒤를 돌아본다. 그의 고개가 다 돌아가기 전에 그를 품에 안았다. 훅 끼치는 미야지의 체취에 하야마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진다. 미야지는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하야마를 밀어냈다. 싫어, 키요시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밀어내지 말고 앉아줘. 투정부리는 그 말에 미야지의 손이 힘을 잃는다. 하야마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가족들의 인정 같은 거 바라지 않아"

"너, 그걸..."

"난 키요시만 있으면 돼.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다 괜찮아"


미야지의 손이 조심스럽게 하야마의 등을 훑는다. 아무 말도 없지만 그 손길에서 그의 기쁨과 슬픔, 모든 것이 느껴졌다. 하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미야지의 품을 감싸던 손을 풀어 그의 뺨을 감싸 쥔다. 생기 없던 흰 뺨이 하야마의 온기로 따뜻해진다. 키요시. 조용한 부름에 미야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야마가 떨리는 마음으로 읊조린다. 

 우리 같이 가자, 같이 살고, 같이 웃고,


"같이 행복하자"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미소 짓는 입술이 움직이더니 고요하게 울리는 미야지의 목소리가 하나의 말이 되어 하야마에게 흐른다.

 그러자.


"함께 사랑하자"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