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여기"




책상 옆에 커피잔이 놓인다. 로우가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까딱이고 다시 책을 바라본다. 도피는 책상이나 주변에 어지럽게 놓인 책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몇일동안 관찰한 결과 로우는 깔끔하게 공부하는 타입이 아니였다. 여기저기 책이나 자료들을 늘어놓고 공부하는 타입이었는데 신기한것은 저렇게 무질서한 책들이 나름 규칙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로우는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느 부분의 지식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 책이 놓여진 곳에서 가서 앉아 책을 읽고 또 다른 지식이 필요하면 옮겨다니고 옮겨다니고, 그런식으로 공부를 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헤매는 일은 전혀 없었다. 저게 천재인건가.


로우가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 구석으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곳에 쌓인 종이뭉치들을 들어 읽기 시작한다. 조금 읽는가하더니 종이뭉치를 내려놓고 누워버린다. 그리고 머리맡에 있은 전공서적을 들어 펼친다.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지치면 저렇게 누워버리는데 누워서도 그 주변의 책들을 읽는다는 것. 식사도 거의 하지않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피는 로우의 손에 문신하던 날을 떠올렸다. 저렇게 미친듯이 공부하는 녀석이 의사인생 말아먹을 문신을 하고 있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저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옆에 붙어있는 것도 신기했다. 도피는 로우가 공부하고 있는 방에서 나와 거실로 갔다. 거실에 뒀던 핸드폰이 진동한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발코니로 나간다. 




"무슨일이야"


-조커, 새로운 거래처에서 협상을 요구합니다.


"협상은 내 취향이 아닌데"


-조직의 책임자가 협상에 참여하지 않으면 거래는 없던걸로 하겠다합니다.


"성가시게 하는군. 곧 갈께"




도피는 통화를 끊고 로우의 방쪽을 바라보았다. 오늘밤은 가게에서 자야겠군. 도피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분홍색 행커칩을 앞주머니에 넣는다. 로우의 방으로 가자 여전히 누워있다. 하지만 이번에 보고있는건 인체해부도. 문을 두드려 노크소리를 내자 시선만 이쪽으로 향한다.




"나갔다올께. 가게에서 잘 것 같으니까 먼저 자"


"어디가는데?"




고개를 끄덕이던가 짧게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질문이 돌아온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도피가 사업때문에 라고 얼버무린다. 다행히 로우는 흥미가 가셨는지 다시 그림에 시선을 둔다. 정장을 입어도 핑크색 악취미는 똑같네. 도피가 웃는다. 예쁘잖아. 그럼 집 잘 지키고있어. 뒤를 돌아 방을 빠져나온다. 현관의 신발장 구석진 공간에서 평소에 쓰지 않던 차키를 꺼낸다. 







*


접선장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다. 가슴께에 총을 집어넣고 주머니에 든 칼을 만지작거린다. 기다렸다는듯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다가온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좀 더 높은값으로 물건을 팔기를 원하는 거래처. 하지만 거기서 내놓는 물건들은 아무리봐도 지금보다 이상의 가격을 책정할만한 품질이 아니었다. 그걸 설명해도 그쪽은 희소성을 들먹이며 고집부리고 있는 상황.




"어떻게할까 조커"


"내가 이딴 졸렬한 조건에 협상하는거 봤나 베르고"


"계획대로하지"




도피가 옷매무새를 다시한번 다듬는다. 손목시계까지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거래처의 최고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책상에 먼저 앉아있다. 도피가 맞은편으로 다가가앉자 남자가 고개를 든다. 드디어 왔군 조커. 도피는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남자는 흔쾌히 악수에 응한다.




"뭐가 불만인거지 컴패니언?"


"별거아니야. 우리가 거래하는 이게 구하기 꽤 힘든거거든. 근데 그정도 가격이면 너무 섭섭해"


"아아 그런건가. 얼마를 원하지?"


"개당 21만원으로 올렸으면하네"


"원래가격에서 너무 올린거 아닌가?"


"그정도로 귀하다니까"




도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정도로 귀하다라. 남자가 거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데서 이런거 못 구하네 조커. 잘 생각해봐. 자네도 이게 중요하니까 이렇게 협상에 참여한거 아닌가. 그렇지. 도피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웃음이 더 짙어진다.




"근데 컴패니언"


"왜그러지"


"자네 여기 스마일에 대한 소문은 듣고 거래를 시작한건가?"


"물론"


"그런데 왜 이건 모르지?"


"뭐 말인가"




스마일 조직은 협상따위는 안 한다고. 도피가 기괴하게 웃는다. 주머니에 든 칼을 꺼내 순식간에 앞에 앉은 남자의 손에 박는다. 칼이 남자의 손을 뚫고 책상에 박힌다. 고통에 찬 괴성이 공간을 울린다. 훗훗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도피는 품에 있는 총을 남자에게 겨누었다. 남자의 뒤쪽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총을 도피에게 겨눈다. 하지만 어느새 그 부하들의 머리통마다 총이 겨누어진다. 어둠속에 숨어있던 도피의 조직원들이었다.




"컴패니언. 죽고싶지 않으면 너희 조직을 나에게 넘긴다는 서류에 도장찍어"




남자가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인다. 베르고가 계약서 세장과 인주을 가져온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엄지에 인주를 묻혀 세장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다 찍은걸 확인하자 도피가 만족스럽게 웃는다. 자신에게 총을 겨눈 조직원들에게 종이를 들어 팔락거린다. 이제 너희들의 보스는 나니까 총은 내려두라고. 그제서야 총들이 거두어진다. 도피는 계약서를 챙겨 베르고에게 건낸다. 베르고가 계약서를 들고 사라지자 그제서야 책상에 박힌 칼을 뽑는다. 뽑으면서 또 한번 고통에 찬 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일어나 뒤를 돈다. 도피는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남자의 왼쪽가슴에 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남자가 피를 흘리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쪽 조직일을 맡을 녀석을 곧 보내지. 일단 일들은 계속 하고 있으라고"




도피는 총을 다시 품에 놓고 뒤를 돌았다. 구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간만에 힘을 썼더니 근육들이 뭉친다. 도피는 간이침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이 상태로 여기서 자면 다음날 온몸이 쑤실텐데.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딱히 화약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 베르고에게 냄새나냐고 물어볼껄 그랬나. 도피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키를 들었다. 설마 로우가 뭘 알아차리겠나. 거울로 아래위를 훑어본 다음에 다시 가게를 나섰다. 지하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오토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집안이 어둡다. 다행스럽게도 로우는 자고있는듯했다. 차키를 다시 신발장 구석에 두고 신발을 벗었다. 오늘도 로우는 공부하던 그 자리 그대로 자겠지싶어 의심없이 방문을 열어 불을 켰다. 하지만 침대에 웅크려있는 몸을 보고는 다시 불을 끈다. 오늘따라 의외의 행동을 많이 한다. 도피는 로우에게 다가갔다. 추운지 잔뜩 웅크려자는 로우의 이불을 더 여민다. 로우는 유독 잘때 체온이 내려갔었다. 인기척에 로우가 눈을 가늘게 뜬다.




"자고 온다며"




잠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로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냥 거기 너무 열악해서 못자겠어. 도피의 말에 짧게 웃더니 다시 이불에 뺨을 묻는다. 도피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뺨을 어루만지자 로우가 기분좋은 숨소리를 낸다. 도피가 일어나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건다. 넥타이를 풀어 대충 의자에 걸치고 단추 몇개를 푼다. 커프스 단추를 풀다가 소매끝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보인다. 설마. 로우를 바라보자 곤히 자고있다. 어두웠으니 못봤겠지. 도피는 욕실로 들어갔다.


도피가 욕실로 들어가자 로우가 눈을 떠 욕실을 바라보았다. 해부 실습하면서 지독하게 맡았던 냄새가 도피의 손끝에 묻어있었다. 피냄새. 사업일을 하러갔다면서 크게 싸웠나. 로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일 상처가 보이면 치료해주면 되겠지. 물소리를 들으며 다사 눈을 감는다. 상처에 물 부으면 안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 도피의 팔을 봤을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겼나보네. 거실로 가 익숙하게 시리얼과 그릇을 꺼냈다. 그릇에 시리얼과 우유를 부어 숟가락을 떠먹는다. 전자달력의 LCD에 날짜가 깜빡거린다. 오늘부터 중간고사였다. 체력관리를 위해 일부러 어제는 도피의 침대에서 잤다. 체온이 높은 도피가 어떻게 밤에 와서 덕분에 따뜻하게 푹 잤다. 컨디션을 보니 이번 시험도 문제는 없어보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해야할 과제가 세개. 그 과제까지 마치면 이 집에서 나가야한다. 물론 도피의 성격을 봐서는 계속 있어도 신경은 안 쓰겠지만 도피의 집과 학교는 멀었다. 시리얼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두고 부엌 한 켠에 있던 혈중독소의 농도를 재는 기계를 집었다. 익숙하게 엄지를 바늘에 찌른다. 피가 기계 안으로 들어가고 삐빅거리는 소리가 난다. 6%. 2주정도만 더 먹으면 독소가 완전히 빠질듯했다. 로우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이제는 익숙한 문신이 보인다. 흠. 짧게 숨을 내뱉었다.


씻고 공부했던 방을 정리한다. 도피의 서재에서 빼냈던 책과 자신의 책을 정리해두니 도피의 책이 현저히 많다. 자신의 책 중 오늘 시험보는 강의교재만 챙겨서 가방에 넣는다. 옷까지 다 입고 가방을 매 도피의 방으로 간다. 아직까지 자고있는 도피의 어깨를 흔든다.




"나 학교갈께"




로우의 목소리를 들은건지 못들은건지 미동도 없다. 로우는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도피가 손목을 잡는다. 오늘 시험? 도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관능적으로 느껴져 로우가 고개를 숙인다. 어. 잘 다녀와. 손목이 가벼워진다. 다시 잠에 빠진 도피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녀올께.







*


마지막 시험까지 끝났다. 로우는 간만에 들른 닥터의 사무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다. 이제 슬슬 도피의 집에서 나와야했다. 어느정도 짐들은 정리해뒀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훑어봐야겠다. 닥터는 채점한 시험지들을 훑어보고있었다. 닥터, 난 몇점이야. 닥터가 시험지를 내려 로우를 바라본다. 대답이 하나라는 건 누구보다 니놈이 잘 알텐데. 로우가 웃는다. 그냥 전보다 공부를 덜해서 혹시나 만점을 놓쳤을까 했지. 건방지긴.




"근데 닥터. 갑자기 과제는 왜 취소한거야"


"귀찮아서"




닥터는 다시 시험지를 훑는다. 로우도 닥터에게 신경을 끄고 핸드폰을 꺼낸다. 방금 시험이 끝났는지 키드에게 문자가 와있다.


[망했다 ㅅㅂ]


멍청한 놈이 공부도 지지리 안하니까 그렇지. 전송을 누르려다 문장을 지워버린다. 빚진게 있으니 갚아야지. 힘내 짜샤 인생이 원래 그래. 전송.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문자를 받고 감동하다가 저번에 자기가 했던 병신같은 말이라는 걸 깨닫겠지. 또롱.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뒤질래ㅗ 내가 무덤까지 가져가랬지]


또롱.


[조까]


이제 로우가 소리내서 웃는다. 전화가 올까 아님 캠퍼스까지 찾아올까. 다시 문자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 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입력한다고 몰랐는데 새로운 문자가 와있었고 키드에게 한 답장은 그 새로운 문자발신자에게 가있었다.


[꼬마 놀러갈래?]

[조까]


키드 개새끼야 고물상새끼 빨간벌거숭이새끼 못생긴놈 뇌가근육으로된놈 나쁜새끼 못된새끼. 괜히 키드에게 화가나 쌍욕으로 도배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급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


"질투요?"


"그게 가장 잘 넘어오는 방법 아닌가?"


"그렇긴하지만 잘 안될 가능성도 농후한데요"


"꼬마한테는 잘 먹힐껄"




도피가 싱글벙글 웃는다. 그럼 제가 뭘 준비해드리면 되나요 도련님. 여자와 몇마디의 말. 모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피가 핸드폰액정을 바라보았다. 이쯤이면 시험도 끝났겠지. 문자창을 열어 문자를 보낸다. 꼬마 놀러갈래? 전송 버튼을 누르고 폰을 테이블에 던져두고 커피나 마실 요량으로 일어나는데 왠일로 바로 답장이 온다. 홀드키를 풀어 문자를 확인한다.


[조까]


잠시 당황스러움에 몸이 굳었다. 폰을 보며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폰을 내려놓고 커피잔에 커피를 따르며 계속 머리를 굴렸다. 아직 저렇게 쌍욕을 받을 만큼 자신을 가까운 사이로 안 봐주던데 무슨 생각인지. 한편으로는 데이트 신청에 대뜸 욕을 받아 화가 난다. 진심으로 한 답장이라면 로우를 강제로 끌고와서 깔아뭉개버릴거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폰을 들었다. 폰을 들자마자 진동이 울리며 로우에게 전화가 온다. 실수로 보낸 문자군. 도피가 웃었다.




"여보세요"


-도피! 그거 잘못보낸거야!




다급한 로우의 목소리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실수 하나로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질투작전 먹힐거라니까. 도피는 로우를 놀려줄 요량으로 목소리를 살짝 깔았다.




"실수를 빙자한 진심 아닌가?"


-아니야! 미안해 도피. 제대로 확인하고 보냈어야하는데.. 많이 화났지?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진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도피는 겨우 웃음을 멈췄다.




"귀여워. 화 안났어, 실수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어"


-뭐야. 화난줄 알았잖아.


"처음 받았을땐 엄청 화났어"


-미안


"그래서 놀러가는 거, 대답은?"


-어? 아아 어디 갈건데?


"저번에 가고싶어하던 헌책방 있었잖아"


-좋아. 후문으로 데리러 와


"지금 당장 오라고?"


-기다리고 있을께




전화가 끊긴다. 예약이라도 있는 날이였으면 어쩌려고. 차키를 챙겨 1층으로 내려간다. 차키를 챙긴 도피의 모습을 보더니 모네가 자연스럽게 CLOSE 팻말을 건다. 요즘 일찍 닫는 일이 잦네요. 모네의 말에 도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심히 들어가. 네, 도련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내용 정정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뒤에 글을 씁니다.


1화에서 로우가 대학교 3학년이라는 말이 나오고

3화에서 고3때를 마지막으로 연애를 3년째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의과대학 특성을 몰라서 일반대학생처럼 구성을 짜다보니 실수가 일어났네요,


로우는 의대 본과 3학년 (즉 5학년) 으로 생각해주시구요

3화의 3년째 연애를 못했다는 것은 5년째 못했다로 바꿔서 기억해주세요 ㅠㅠ


죄송합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