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모네가 기계에 나온 수치를 보더니 웃는다. 축하해요. 로우가 엄지를 닦다가 고개를 든다. 0%에요? 네. 로우의 표정이 밝아진다. 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긴다. 모네가 작업실을 바라봤다가 로우를 본다.



"도련님이 오늘은 예약이 밀려서요. 데이트는 못 할거같네요"



모네의 말에 로우가 고개를 돌린다. 당혹스러운 표정. 모네는 티나지않게 미소지었다. 로우가 멋쩍은듯 머리를 긁는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정말요? 미안해요, 둘이 너무 가까워서. 아니에요. 모네를 향해 한번 웃어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도피한테 왔었다고만 전해주세요. 로우가 가게를 나가자 모네가 고개를 돌린다.



"생각보다 로우가 도련님을 맘에 들어하는 것 같네요"



어느새 도피가 작업실 문턱에 기대어 모네를 본다. 그렇지. 질투할거라니까. 도피가 웃었다. 그것보다 여자 하나 준비해두랬더니 조직원을 데려오는건 무슨 심보야. 글쎄요, 섹시한건 베이비5가 한몫 하잖아요. 도피는 인상을 쓴다. 어디가 섹시하다는거야. 도피가 소파에 앉아 스케치북을 꺼내든다.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들은 죄다 로우였다. 그림 속 로우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빨리 내 손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조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형적인 하녀의 옷을 입은 여자가 내려온다. 도피가 이마를 짚는다. 그건 또 무슨 패션이야 베이비. 베이비5가 수줍게 웃는다. 지금 남자친구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해서. 도피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로 다가온다. 그림? 귀여운 꼬마네. 도피의 스케치북을 빼앗아 요리조리 살펴본다. 조커의 사랑이 가득 담겨있어. 도피가 짧게 웃는다. 너랑 나이차 얼마 안나.



"왜 내려온거야?"


"심심해서. 이번에 새로 배정받은 그 조직, 꽤 재미있었단 말이야. 여기는 재미없어"


"아아 거기 너가 가게 됐나?"



베이비5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도피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어리광이 다시 심해졌군. 모네가 여기있는동안은 어리광 부리라던데. 네가 꼬마였을 때만큼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스케치북을 보다말고 도피의 말에 베이비5가 고개를 든다. 눈에 장난이 가득 배어있다. 누가 자기가 키운 녀석 아니랄까봐 이런건 소름끼치도록 비슷하다. 도피가 한숨을 쉬며 팔을 들어 소파에 걸친다. 그러자 베이비5가 도피의 허벅지에 올라탄다. 아이였을때 몰랐는데 다 큰 후에 당해보니 이제는 징그럽다. 이제 나올 대사는 조커 왜 내 연애를 방해하는거야.



"조커 왜 내 연애를 방해하는거야"



도피가 웃는다. 머저리같은 속물들만 데려와서 사겼으면서 자신의 멱살을 잡고 저렇게 말했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그나마 괜찮은 남자를 데려왔는데 이번 남자친구가 이런 악취미라하니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듯 했다. 또 이상한 쓰레기같은 남자를 주워온건 아닌지. 일단 본인의 평가부터 들어봐야지.



"베이비"


"응?"


"저.. 도련님"




모네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네가 보인다. 왜? 라고 물으려다가 스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로우가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

가게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해가면서 메세지 수신음에 폰을 꺼내들었다. 문자를 확인하자 얼마전에 연락이 온 펭귄이었다. 닥터를 따라 갔던 학회 세미나에서 만난 소아과 의사였는데 죽이 잘 맞아 만난 그 날 같이 술을 마셨었다. 기분이 좋아 정도이상으로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던 자기를 챙겨주어 더 친해졌었다. 그 때 그는 자기가 아끼는 어린환자와 나의 분위기가 닮았다했다. 최근에 들은 소식으로는 해외의 병원에서 일한다던데. 직업병 때문인지 그는 꼬박꼬박 어린 자신에게 존댓말을 썼다.

[로우 뭐해요]

걸으면서 답장하기 귀찮아 다시 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이제 답장을 하려고 폰을 꺼냈는데 바탕화면에 따로 지정해놓은 빨간색 문구가 보인다. 
'도피에게 책 빌려오기. 오늘까지' 
아, 귀찮아. 펭귄의 답장은 일단 미루고 걸음을 옮겼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서 로우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까짓거 그 책 그냥 빌리지말까. 하지만 이 책이 있어야만 지금 쓰고있는 레포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레포트 제출은 내일까지였고. 그럼 레포트 내용을 바꿔버릴까. 그건 지금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귀찮았다. 고민하고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가게 앞에 도착해있었다. 생산적이지 않은 고민이었군. 가게의 문을 열자 모네가 보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네가 돌아본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곤란함이 피어오른다. 왜지? 로우가 모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왜 모네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했다.



"베이비"


"응"



도피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있는 여자. 그 여자를 다정하게 부르는 도피. 오늘 예약 밀렸다던게 이런거였나.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던 모네가 먼저 입을 연다.



"저.. 도련님"



도피가 이쪽을 바라본다.






*

"간 줄 알았는데"


"책 받기로 한 게 생각나서"


"맞다"



도피가 자신의 무릎에 앉아있는 베이비5를 쳐다본다. 뽀뽀해줘야 비켜줬었잖아. 베이비5의 말에 도피가 웃더니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한다. 그러자 베이비5가 도피의 무릎에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도피가 몸을 일으킨다. 2층으로 가자. 로우는 말없이 도피의 뒤를 따른다. 언뜻 본 로우의 표정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와 도피는 한켠에 있는 책장 앞에서 책을 찾는다. 로우가 그런 도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위화감없이 허벅지에 앉는 사이. 베이비라는 애칭을 쓴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뺨에 가벼운 키스까지 한다. 오래된 관계. 애인. 결론이 나오자 배신감이 로우를 덮친다. 덩달아 슬픔과 분노, 절망, 고통 등의 감정들까지 물밀듯이 쏟아진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오려는 것을 참는다. 또롱. 문자알림음이 구세주라도 되는양 도망치듯이 폰을 확인한다.

[바쁜가보네]

펭귄의 문자를 보자 외로움까지 고개를 든다. 위로가 받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의 문자에 답장을 했다.

[아니. 왜?]
[보고싶어서요]
[그러게 나도 보고싶다]
[오늘 만날까요?]
[외국 아닌가?]
[입국했어요. 그러니까 연락했지]
[술이나 마실까]
[또 로우씨의 밤을 책임져야하나?]

그의 위트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있다보니 사람 달래고 챙겨주는 일을 잘하는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 볼까' 전송버튼을 누르려는데 등 뒤에서 큰 손이 핸드폰을 가져간다. 고개를 돌리자 도피가 핸드폰의 문자를 보고있다. 로우가 잔뜩 인상을 쓰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뭐해"


"로우. 다른 남자가 있었나?"



차가운 그의 말투에 로우가 헛웃음을 짓는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를. 저는 자기에게 좋아한다고 말까지 하고 다른 여자가 있던 주제에. 도피의 손에 든 폰을 낚아채 주머니에 넣었다. 신경끄고 책이나 줘. 손을 내밀었지만 도피는 가만히 서있었다.



"뭐해 책 줘 ...!!"



도피가 로우를 소파에 밀치듯이 앉히고는 거칠게 입을 맞춘다. 선글라스가 거슬리자 입이 맞닿아있는 상태에서 벗어버린다. 벗다가 끝부분에 긁혀 로우의 뺨에 상처가 난다. 도피는 신경쓰지않고 로우와 혀를 섞는다. 로우는 도피를 떼어내려 그의 어깨를 밀쳤지만 헛수고였다. 혀를 섞는 질척한 소리가 난다. 숨이 막힐 쯤에서야 도피가 입술을 뗀다.



"내것이 될 수 없다면 남의 것도 되지마. 남의 것이 되려면 나의 것도 돼"



으르렁거리는 도피의 목소리가 로우의 귀를 파고든다. 사나운 눈빛이 로우를 응시한다. 진심으로 분노를 표하는 모습이 우습다. 둘이나 가지려는 욕심이라니. 아니 둘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셋, 넷,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수도 있겠지. 로우가 짧게 웃었다.



"무슨 심보야. 그러는 당신은 여자 잘만 끼고있었잖아"



로우는 말을 뱉어 난 다음에 후회했다. 순정만화의 여자주인공처럼 치졸하게 굴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 절망스럽다. 얼마나 우스울까. 이렇게 뻗대고 있는 녀석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게. 자신만 진심을 준 거 같아 억울했다. 숨기고 숨겼던 사실을 이렇게 드러내는게 분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도피의 손에 의해 고개가 들려진다.



"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 녀석 들먹이면서 말돌리지마"



아무것도 아닌 사이. 로우는 이제 비참함을 느꼈다. 그정도 사이가 그런 관계라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보다 더 못한 관계였다. 



"그걸 어떻게 믿지? 내가 그 남자가 학회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믿겠나?"


"그런 사이랑 보고싶다, 밤을 책임진다 이런 대화도 하나?"


"아무것도 아닌 사이를 무릎에 앉히고 뽀뽀 하는 게 더 이상해"




도피는 한마디도 지지않고 대꾸하는 로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확신에 차 있다. 도피가 흥분을 가라앉히기위해 숨을 크게 내쉰다. 정말, 정말 그런 사이냐. 예전에 같이 술마셨다가 신세졌던 사이야. 그만 좀 질척하게 굴고 떨어져. 로우가 도피를 밀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더이상 화가 참아지지 않는다.



"웃기지 않는 짓거리 그만해. 다른 여자 있는데 들이댔으면서 왜 이 상황에서 상처받은 척이야. 상처는 내가 더 받았어. 알아? 어렵게 마음줬더니 이렇게 뒷통수 당한 내가 더 아파. 이깟 문신에 빠진 내가 병신이지. 지워버릴거야.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여기서 끝내 이 나쁜새끼야"



눈물이 떨어진다. 뺨에 난 상처와 눈물이 만나 핏물이 흘러내린다. 로우의 눈물에 도피가 뒤로 조금물러난다. 그걸 눈치채고 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향한다. 로우. 도피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로우의 팔목을 붙잡는다. 로우가 돌아선다. 살과 살이 맞부딫히는 소리가 난다. 로우가 팔을 빼내고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2층으로 모네와 베이비5가 올라온다.



"도련님 뺨이.."


"뺨보다 저 남자애가 더 문제인거 같은데"



도피는 얼얼한 뺨을 만졌다. 베이비5의 말대로 아픔보다는 로우를 놓쳤다는 생각이 더 컸다. 도피는 소파에 뒹구는 선글라스를 집었다.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다시 낀다.



"..예상보다 로우의 마음이 컸어"






*

키드는 로우의 자취집 문 앞에 서있었다. 주말내내 연락도 되지 않았고 로우를 무척 아끼는 교수 하나가 자신을 찾아와 로우가 과제를 내지 않았다는 말에 로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병결로 강의도 죄다 빠져버리고. 초인종을 눌러봐도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결국 손으로 문을 내려친다. 한참을 쾅쾅거리자 그제서야 문이 열린다. 초췌한 로우의 모습에 키드가 기겁한다. 너 진짜 아프냐? 로우는 말 없이 뒤를 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키드가 로우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누워 잔뜩 웅크려있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옆에 걸터앉아 로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야 너 열나"



로우는 이불에 더욱 더 고개를 파묻는다. 물수건해올께. 몸을 일으켜 수건을 가지러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문고리에 끈적한게 만져진다. 뭐야. 검은 얼룩이 손에 묻어있다. 다른손으로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열었다. 으아아아악!! 키드가 당장 로우에게로 다가가 이불을 들춰낸다.



"무슨짓이냐 너"


"..."


"뭘한거냐고!!!!"



키드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로우가 힘겹게 눈을 뜬다. 
신경꺼.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