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강/아카후리] 퍼즐

2013. 12. 9. 14:50 from KB/짧은글

※ 적강적 합작 (http://akafuriaka.xo.st/) 에 참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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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천재라고 불렸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로 올라오면서 어려움 없이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혔다. 그의 종목은 사격에서도 권총이었는데 그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아이들은 잘 어울린다고도 말했다. 국가대표로 뽑힌 학생들은 방학동안 합숙훈련을 했다. 아카시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다른 종목이라는 것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카시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국가대표를 그만둔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카시는 합숙을 시작하면서 룸메이트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리하타 코우키. 이름만 아는 룸메이트였다. 


아카시의 의문은 얼마 안가서 곧 풀렸다.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후리하타가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카시는 말이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이유를 찾지 못해 관두었다. 같은 방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말을 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씻고는 잠에 들었다. 아카시는 몸을 돌려 벽을 보고 잠에 든 후리하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후리하타는 피곤했던지 금방 규칙적인 숨을 뱉어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소총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소총은 연습이 고된 것일까.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그 날을 제외하고는 아카시는 여전히 후리하타를 보지 못했다. 식당에서라면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후리하타를 찾을 마음은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연습 후에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아카시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격은 연습시간이 권총과 소총에 관계없이 똑같다는 것. 아카시는 그제서야 후리하타에게 흥미를 느꼈다. 조금은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카시는 식사를 마친 후 소총 선수들이 쓴다던 사격장으로 향했다. 사격장에는 5명도 안 되는 학생이 저녁 먹고도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 반이 남자였던지라 아카시는 사격장 구석의 벤치에 앉아 그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한시간 정도 지났을 때 사격장에는 아카시와 갈색머리의 남자아이,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아카시는 자꾸 안경을 치켜올려 눈을 비비는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직감적으로 아카시는 그 아이가 후리하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카시는 바로 다가가기 보다는 조금 더 후리하타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아카시가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자.”


후리하타가 움찔거리더니 총을 내려놓는다. 아카시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후리하타가 입을 벌려 ‘아’하고 멍청한 소리를 낸다. 


“고마워. 까먹고 안 들고 왔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후리하타는 머뭇거리며 아카시의 손 위에 놓인 인공눈물을 집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손을 잡아끌어 그에게 안약을 쥐어주었다. 고맙다면 쓰지 그래. 후리하타가 안약을 쥐더니 멋쩍은 듯이 웃었다. 혼자서는 잘 못 넣어서. 남 앞에서 못 넣는 거 보여주기도 민망하고. 분명 가달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지만 아카시는 모른 척 다시 후리하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넣어줄게. 후리하타는 조금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안약을 아카시에게 건넸다. 부탁할게. 아카시는 간이 의자에 앉은 후리하타의 눈가를 꾹 누르며 인공눈물을 넣어주었다. 한쪽 당 두방울씩, 다 넣었을 때 후리하타는 마치 우는 모양새로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카시는 인공눈물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눈물을 다 닦은 후리하타가 아카시를 올려다보았다.


“아, 저- 고마워. 그……”

“아카시 세이쥬로.”

“아카시군.”


다음부터는 까먹지 마. 아카시의 말에 후리하타가 옅게 웃었다. 아카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후리하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나저나 후리하타군, 언제 들어갈거야? 후리하타는 눈을 크게 뜨며 아카시를 보았다. 아카시는 그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라도? 후리하타는 고개를 저었다. 내 이름, 알고 있길래. 확실히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이름을 몰랐지만 아카시 본인은 후리하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상황이 조금은 기분이 나빴지만 큰일은 아니니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넘겼다.


“같은 방이니까.”

“아- 으, 응! 그렇네!”


그렇네는 무슨. 방금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티는 다 내고 있으면서. 아카시는 후리 모르게 혀를 한번 차고 다시 물었다. 언제 들어갈거냐고 물었어. 후리하타는 파드득 놀라더니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일찍 들어갈까? 아카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대로. 그렇게 말하고는 아카시는 아까 앉았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 후리하타는 아카시를 한번, 시계를 한번 보더니 다시 총을 잡았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후리하타는 구멍 뚫린 과녁들을 보더니 이내 한숨 쉬고는 주변을 정리했다. 아카시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후리하타에게 다가갔다.


“갈까?”

“어? 어어-”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둘러매는 기다란 가방을 흘긋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가는 동안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영 어색한지 약간 뒤로 떨어져서 걸었다. 두사람 사이에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후리하타는 흘긋거리며 아카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흔히 보기 힘든 붉은색 머리. 후리하타는 혹시 북유럽 쪽 계열의 혼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읽기나 한 듯 아카시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렸다.


“내일.”

“응!!”


후리하타의 과한 반응에 아카시가 살짝 인상을 썼다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같이 가자. 어딜? 아카시는 대답 할 가치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다시 숙소를 향해 걸었다. 후리하타는 그런 아카시를 보다가 이내 후다닥 아카시의 약간 뒤쪽에 따라붙는다. 아카시는 모른 척 살짝 걸음을 늦추어 후리하타의 옆에 섰다.


“그래! 숙소에서는 음- 권총 쪽 사격장이 더 가까우니까 거기서 연습할까? 나 총도 들고 다니고, 아카시군은 놔두고 다니는 것 같으니까!”

“내일모레부터는 내가 들고 다닐테니까 너희 사격장에서 연습하자.”

“좋아”


아카시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자신과 나란히 걷는 후리하타를 보고는 옅게 웃었다. 




그 후 두사람은 눈에 띄게 친해졌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난 만큼, 숙소를 같이 쓰는 사람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데 같은 방인 아카시와 후리하타는 서로의 일에 바빠 혼자 다녔었던 터였다. 그랬던 두사람이 개인연습도 식사도 같이 하는 것은 눈에 띄는 것이 당연했다. 무엇보다 아카시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후리하타는 소총에서 에이스였고, 아카시 역시 권총에서 에이스였기에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끼리끼리 논다, 두사람에게 붙은 말이었다. 후리하타는 그 소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신경 쓰는 듯 했지만 아카시는 그답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리하타, 머리 말려."

"으응, 이거만 하고."


아카시는 침대에 기댄 채 쪼그려 앉아 퍼즐을 맞추고 있는 후리하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머리카락에 물기가 흥건한 모습에 아카시가 한숨을 쉬더니 마른 수건을 가져와 후리하타의 뒤편에 앉았다. 다리 사이에 후리하타를 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내자 후리하타가 고개를 들어 아카시를 올려다보았다. 빨간색만 맞추면 다 되는데.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머리를 꾹 눌러 밑을 보게 하고는 물기를 털어냈다. 후리하타는 그 와중에서도 계속 끙끙거리며 퍼즐을 풀었다. 후리하타가 퍼즐을 다 맞췄을 때, 아카시도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저 멀리 빨래를 두는 곳에 던져두었다. 후리하타는 멋쩍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고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다 맞춘 퍼즐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카시의 책상에는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의 퍼즐이 색이 맞춰진 채로 놓여있었다. 후리하타는 늘어서 있는 퍼즐 옆에 자신의 퍼즐을 놓아두는 아카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있지."

"응."

"아카시는 혼혈이야?"


후리하타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에게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후리하타는 콧잔등을 긁더니 아카시의 붉은 머리카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카시는 얼마 전 짧게 자른 머리를 슬쩍 만졌다고 고개를 저었다. 순수 일본인이야. 태생적으로 색소가 옅을 뿐. 물론 붉은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어. 후리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색깔이 특이해서 분명 서양 쪽 피가 섞여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아카시는 제일 앞쪽에 있던 큐브를 후리하타에게 건넸다. 후리하타는 큐브를 이리저리 돌려 색깔들을 뒤섞어 놓았다. 어느 정도 섞이자 후리하타는 다시 그것을 아카시에게 주었다.


"후리하타는 어떤 사람이야?"

"에? 어떤 사람이냐니- 그것보다 왜 그런걸 묻는거야?"

"글쎄."


심드렁한 목소리를 뱉으며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섞어놓은 색깔들을 하나 둘 맞춰가기 시작했다. 후리하타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사격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 시작했다는 것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된 과정까지. 아카시는 여전히 큐브를 돌리면서 아무 말 없이 후리하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후리하타의 말이 끝날 때마다 꼭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색이나 음식, 학교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 후리하타는 꼬박꼬박 답해주면서 어떤 때는 웃다가 어떤 때는 또 인상을 쓰기도 했다.


"그럼, 아카시는 어떤 사람이야?"

"너는 왜 그런걸 묻지?"

"그야- 관심이 있으니까."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퍼즐의 색이 전부 맞추어졌다. 아카시는 몸을 일으키더니 후리하타가 맞춰놓은 퍼즐 옆에 자신의 퍼즐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다시 제일 앞에 둔 퍼즐을 집어 뒤섞는다.


"보시다싶이 별거 없어. 다 맞춰진 퍼즐 같은 사람이야."

"그럴리가. 나한테는 아카시가 뒤죽박죽인 퍼즐을 푸는 사람처럼 보이는걸."


아카시가 옅게 웃더니 어지럽게 섞어놓은 퍼즐을 후리하타에게 던졌다. 나 먼저 잘테니까 풀어. 후리하타가 퍼즐을 슬쩍 보더니 침대 옆에 둔 총가방 위에 올려둔다. 나도 잘래, 오늘은 더 이상 풀고 싶지 않아. 그러더니 훌쩍 이불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린다. 아카시는 그 모습을 봤다가 이내 몸을 눕힌다. 아카시의 시선에 퍼즐이 보였다. 아카시는 그 퍼즐을 보고 미소 지었다. 뒤죽박죽인 퍼즐. 꼭 후리하타 같았다.




“싸움?”


어쩐지 후리하타가 안 보인다 했다. 아카시는 매번 점심시간마다 만나던 장소에서 후리하타를 기다렸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10분이 남을 때까지 후리하타는 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혼자 식당에 간 아카시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했다. 후리하타가 같은 파트의 선수 하나와 싸웠다는 것. 정확히는 일방적인 폭행. 아카시의 물음에 폭행이라고 정정해주던 아이는 아카시를 슬쩍 보더니 ‘걔네 코치님이랑 같이 사격장에 있을걸.’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아카시는 망설임 없이 사격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늦었던 것인지 사격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점심시간까지 끝난 탓에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찾지도 못한 채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연습이 끝나자마자 소총 사격장에 가보았지만 후리하타는 없었다. 매번 서로를 기다리던 곳에도, 식당에도 없자 아카시는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은 아카시의 짐만 남은 채 텅 비어있었다. 그래도 에이스인데 이렇게 쉽게 나가나.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이름만 알지 학교나 연락처, 집 주소도 몰랐다. 밀려오는 허무함과 아쉬움에 아카시가 결국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렴풋이 후리하타의 바디워시의 향이 맡아졌지만 그 뿐이었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 아카시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퍼즐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쪽지까지도. 아카시는 급하게 쪽지를 들었다. 답지 않게 정갈한 글씨로 네줄정도 되는 쪽지였는데 거기엔 후리하타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밑에 짧게 ‘사정이 생겨서 그만두게 되었다. 미안.’이라는 문장 또한 있었다. 아카시는 쪽지를 바라봤다가 다시 책상 위에 두었다. 사정, 그 두글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카시는 후리가 말한 그 ‘사정’이라는 것이 있겠거니 해서 빈자리에 대한 신경을 꺼버렸다. 애초에 혼자 다녔기에 그냥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간혹 후리하타와의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아카시는 함께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던 장소에 가만히 앉아있고는 했다. 그 곳이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 무척이나 조용했기 때문이다. 앉아있으면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사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일방적인 폭행의 이유. 자신이 보아왔던 후리하타는 온순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혹시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었나. 아카시는 여러 가지 추측해보았지만 굳이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떠나고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이유 모를 찝찝함에 저녁을 먹고 그 장소에 앉아 어렴풋한 가로등빛에 기대어 퍼즐을 풀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해서 마음을 가다듬기 좋은 곳이었는데 퍼즐을 반 정도 풀고 있으려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여자아이들의 목소리였는데 아카시는 그저 뒷담화 정도려니 하고 관심을 껐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익숙한 이름은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리하타군이 아카시군 좋아한다는 거 사실이야?”

“그럴걸? 안 그랬으면 때리지도 않았을 거 아냐.”

“하긴. 다카미군이 협박 했다고.”

“응. 근데 성적이 좋으니까 코치가 반성문으로 넘기려고 했는데 후리하타군이 그냥 나간다고 했대.”

“에에- 어째서?”

“나야 모르지. 근데 내가 보기엔 그런 소문나면 아카시군한테 피해갈지도 모르니까 나간 것 같아.”

“우와, 로맨티스트!”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퍼즐이 맞추어졌다. 아카시는 몸을 일으켰다. 여자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지나가는 게 더 빠르겠지만 일부러 둘러서 숙소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책상 한구석에 둔 쪽지와 동전을 챙겨서 나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몇 개의 카드용 공중전화를 지나 드디어 동전용 공중전화를 발견하고는 전화박스 안에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고 떨리는 손으로 쪽지에 적힌 글자를 꾹꾹 눌렀다. 신호음이 두 차례 정도 흐르더니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후리하타.”

‘엣? 아카시?’


후리하타의 말에 아카시가 본의 아니게 움찔거렸다. 어떻게 나인줄 알았어?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냥 모르는 번호인데 내 이름 부르니까 아카시일 것 같았어. 아카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늦게 전화한 거 아니야? 미안, 조금 일이 있었네. 오랜만에 듣는 후리하타의 목소리는 살짝 톤이 높아진 것을 제외하고는 여전했다. 후리하타는 나간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조잘거리며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동전을 더 집어넣고 전화박스 한켠에 기대어 후리하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보다 왜 전화한거야? 그냥 안부?’


아카시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했던 전화였기에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눈을 꾹 감았다 뜨고 입을 열었다.


“너희 집, 어떻게 가?”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선수들은 며칠정도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휴가를 받았다. 아카시는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본가가 있는 교토가 아닌 도쿄행 티켓을 끊었다. 후리하타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리 오래 힘들지는 않았다. 후리하타는 세이린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그의 집은 그 고등학교 근처였으며, 그 고등학교는 아카시가 중학교 동창 쿠로코 때문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아카시는 처음 쿠로코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놀란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후리하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같은 도서부원이라니, 세상 참 좁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시는 긴장 때문인지 살짝 굳은 손을 쥐었다가 편 뒤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혹시 그의 가족이 나오지 않을까 긴장한 것도 잠시 대문이 열리고 후리하타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리하타의 눈이 커진다. 아카시! 예상했던 반응에 아카시가 살짝 미소를 짓자 후리가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아카시와 눈을 마주친다. 들어올래? 아카시는 고개를 저었다. 곧 가야해. 미리 끊어둔 교토행 기차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 후리하타가 아쉬운지 눈을 내리깔자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조금 어색한 기분에 마른입술을 혀로 살짝 축였다.


“후리하타.”

“으, 응?”


두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후리하타의 옅은 갈색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카시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왜 나간거야. 추궁과 질문 사이의 말투에 후리하타가 옆으로 비스듬히 눈동자를 옮겼다. 아카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한 번 후리하타를 불렀다. 후리하타의 시선이 다시 아카시를 향했지만 입은 여전히 열지 않았다. 아카시는 더 이상 추궁해봤자 소용없을 듯 하여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아카시가 발길을 돌리려는데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옷자락을 쥐었다. 저기, 아카시. 아카시가 몸을 돌려 후리하타를 바라보았다. 후리하타는 뭐가 부끄러운지 뺨을 붉힌 채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어떤.”

“나 대신 금메달 따줘.”


후리하타의 고개가 더 숙여졌다. 아카시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대신’이라.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카시의 대답에 후리하타가 고개를 들더니 기쁜 듯 웃는다. 고마워. 아카시는 그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리하타는 그제서야 아카시의 옷자락을 놓더니 뭔가 생각난 듯 ‘잠깐만’이라고 얘기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시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출발해야 할 텐데. 안에서 쿠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후리하타가 퍼즐을 들고 나온다.


“자! 이제 너가 맞출 차례잖아. 내가 고심해서 어렵게 섞어놨어.”


아카시는 퍼즐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대충 섞어놓던 전과는 패턴이 달랐다. 아카시가 가방 안에 퍼즐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 응, 조심히 들어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나가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시는 계속 바뀌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금메달을 따면 후리하타에게 고백해야지.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카시는 가볍게 몸을 실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