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로우] 새

2013. 5. 17. 00:27 from OP(동결)/짧은글


< 전편 >








*


'너와 간만에 술이라도 할까 했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 때까지는 마냥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조롱 섞인 말을 했었다. 네까짓게. 아니 그런 마음보다는. 나의 것인 주제에. 녀석에게 하트라는 이름의 해적단을 주었다. 그리고 녀석이 만족할 때 저 남사스러운 하트모양의 의자에 앉게 해주려했다. 가장 아끼고 가장 사랑하는만큼. 하트. 심장. 나의 심장을 너에게 주려했다. 하지만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이야. 입 안에 쓴 맛이 돌았다. 드레스로사에서도 고급 중 고급이라는 술이라는데 맛은 더럽게 없었다. 술이 들어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유리잔. 로우는 그랬다. 유리잔. 나를 봐달라고 힘을 꽉 주면 깨질듯했던 녀석. 근데 이제 다시 보니 놈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잔이었다. 겉보기에만 유리, 속은 다이아몬드. 이젠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녀석. 눈을 꾹 감았다.




*

"로우 뭐 가지고싶은 거 있어?"
"책"

또다. 언제나 가지고 싶은 거 있느냐 원하는게 있느냐 바라는 게 있느냐 무엇이 좋느냐 물을 때 마다 로우의 대답은 똑같았다. 책. 의료도구. 나는 녀석에게 좀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 또래들처럼 옷이나 장난감 같은 걸 조르길 바랐고 투정 부리길 바랐다. 나의 눈치를 보는걸까. 로우는 느끼지 못했지만 로우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내가 로우를 무척 아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건지 감정이 매마른건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로우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무심한 표정.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애정을 쏟는 존재의 무표정이란 퍽 가슴 아픈 일이다. 몸을 숙여 로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한동안 못 볼테니까, 작별의 키스"

내 말에 로우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는다. 다 여물은 성인도 아닌데 웃는 모습이 관능적이다. 오래 다녀올거면 더 깊게 해도 돼. 로우의 뒷목을 잡고 더 깊숙한 곳을 훑는다. 트라팔가 로우. 네가 좋다. 본인에게 말하면 비웃음 당할것을 알기에 속으로만 읊조린다. 네가 좋다.




*

밖이 소란스럽다. 벌써 저택 내부까지 들어왔나보다. 아니다. 로우 혼자서 여길 쳐들어왔다면 이제서야 저택 내부다. 나는 그를 무척 사랑했었다. 지금도 무척 사랑하고. 나를 이렇게 배신해도 나는 그를 사랑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가슴 한가운데가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저가 죽였던 청승맞게 목숨을 빌며 울어대던 것들이 생각났다. 저도 그들과 다를게 없었다. 사랑을 빌며 울어댄다. 단 한사람의 존재로 나는 이렇게 망가진다. 파멸하고 저 지옥 밑바닥까지 쳐박힌다. 네가 나를 망쳤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

거래를 위해 들린 한 섬에서 흰색에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 모자가 보였다. 묘하게 로우에게 어울리겠다 싶어 당장 모자를 샀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가 로우에게 선물해주었을 때 보기 드문 기쁜 표정을 보았다. 아마 그 때부터 나갈 때마다 그에게 선물을 하나씩 사왔다. 하지만 그 때와 같은 표정은 짓지 않았다. 혹시나 다시 한번 그 표정을 볼까봐 꽤 고군분투했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로우가 상처입은 동물을 돌봐주는 걸 보게되었다. 그는 나에게는 전혀 지어주지 않는 표정으로 동물들을 바라보았다. 왜 나에게만은 그런 표정을 짓는건가. 들끓는 분노에 그 동물을 죽여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동물들을 주워왔다. 그 때마다 질투에 눈이 멀어 죽이고 또 죽였다. 언제가는 그 시체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공포심. 오직 나에게만 지어주는 표정. 그 후로는 그 표정을 위해서 온갖 짓을 다했다. 인간의 시체를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표정도 어느순간 사라져버렸다.




*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 피를 잔뜩 묻히고 온 그녀석은 역시나 관능적이었다. 여전히 섹시하구나. 나의 농담에 그가 실소를 흘린다. 이 저택을 나간 이후 처음 보는 그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수염도 길렀고 내 이름을 새긴 팔에는 문신을 했다. 입 안이 더 써졌다. 유리잔에 담겨있던 술을 한번에 털어 마셨다. 알콜향이 목구멍을 찌른다. 

"기특하니 선물을 주지"
"필요없어"
"아니 거부 할 필요 없어. 아주 마음에 들거야"

그가 능력을 쓰지 못하게 그의 손을 실로 묶었다. 당황한 표정이 기분이 좋다. 자유로운 한손으로 그를 붙잡는다. 그의 몸을 움직여 탁자에 놓아둔 칼을 집어들게 한다. 더더욱 일그러져 가는 그의 표정이 보인다. 그를 나의 앞으로 데려온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무슨 짓이야"
"말했잖아, 선물"
"도대체 무슨!!"

칼을 든 로우의 손이 나의 배를 찌른다.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쑤신다. 이를 악 물고 한번 더 찌른다. 로우는 또 처음보는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은 읽어낼 수가 없다. 고통? 절망? 쾌감? 만족? 목구멍으로 뜨거운 게 역류한다. 로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를 내는듯 귀가 따갑다. 얼마전에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직접 손으로 죽이면 그 감각 때문에 평생 잊을 수 없대. 아아. 그래. 힘이 빠지는 손을 한번 더 움직이자 로우의 손이 나의 목을 감는다.

"그만둬!! 도플라밍고!!!!!"
"이 감각 평생 잊지마라, 로우"

손에 힘을 더 주면 줄 수록 목에 가해지는 압력 또한 커진다. 숨이 막힌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죽은 나를 선물한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