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팔에 그게 뭐냐"


"도피가 변태라는 증거지"


"악취미군"




키드가 로우의 팔에서 시선을 뗀다. 그 날 이후로 꾸준히 연고를 바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울긋불긋하게 쓸린 상처가 남아있는 팔을 바라보았다. 키드가 로우에게 후드 하나를 던진다. 그거 입어. 후드를 보니 고등학교 때 부터 키드보다 자기가 더 많이 입었던 옷이다. 노란색이 어울리지 않는 키드에게 이 옷의 존재는 미스테리였다. 후드를 입고 키드의 커다란 침대에 누웠다.




"이 불편한 집에 초대한 이유가 뭐냐"




키드는 후계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본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리고 로우에게 키드의 본가는 껄끄러운 곳이었다. 특히 키드의 어머니. 키드도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는다. 대학 졸업하면 보기 힘들 것 같아서. 키드의 말에 로우가 웃는다. 이럴때만큼은 두살 어린게 실감이 난다. 생긴 것과 다르게 은근히 정이 많고 배려심이 깊다. 물론 자기 사람에게만. 키드가 사고치면 로우가 수습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너 옛날에 촌장할아버지랑 싸웠던 거 기억하냐"


"뭐로 싸운거? 그 영감이랑은 온갖 일로 다 싸워서"


"송아지 괴롭힌거 들켰을 때"




아아. 키드가 웃는다. 자기가 송아지 괴롭혀놓고 들키니까 적반하장으로 촌장에게 화를 내어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싸운 이유는 많았지만 로우는 자신의 기억에서 가장 악동같았던 것은 그 때라고 생각했다. 벌써 알게된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키드는 기업을 잇고, 로우는 의사가 된다.




"너 그 의사시험 준비하고 있냐"


"의사국고시? 곧 해야지"


"그거 어렵다던데. 지금부터 준비하면 안 늦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나가 죽어라"




머리 좋다고 뻐기다가 떨어져라. 그 말에 로우가 키드를 발로 찬다. 꽤 힘을 주었기에 키드는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성격 더러운 새끼야! 투덜거리면서 다시 침대에 기어 올라오는 놈을 한번 더 찬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제서야 로우가 발을 거둔다. 겨우 침대에 누운 키드가 한숨을 쉰다. 로우가 키드를 바라보았다. 뭐? 아니야.




"경영공부 할만하냐"


"아니 죽을맛이지. 누구처럼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러게 경영학과를 갈 것이지"


"4년동안 그 재미없는 거 배우기 싫다고"




키드가 엎드려있던 몸을 뒤집는다. 로우가 멍하게 키드의 붉은 머리를 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왜. 핫팩 안고 자려고, 너 빨간머리 보니까 생각났다. 방 한켠에 충전하고 있던 전자핫팩을 들어올린다. 충전기를 빼고 스위치를 키자 금방 따뜻해진다.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와 핫팩과 함께 몸을 웅크린다. 너도 고생이다, 겨울에 핫팩 없으면 못 자지? 도피 있으면 잘 수 있어.




"그러고보니 그 인간 요즘 바쁜것 같던데. 미용실 형이 몇주전부터 타투샵 닫혀있다고 하더라"


"어. 밤에도 전화와서 나가고 그래"


"밤에?"




키드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고민하는듯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알아봐줄까? 로우가 고개를 젓는다. 사업이 관련된 일 때문에 바쁜거야. 그제서야 키드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라. 로우가 작게 웃는다. 잠이나 자 병신아.







*


이른 아침, 올해는 유독 추워 한겨울이 시작되기도 전에 눈이 내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로우는 두텁게 옷을 입고 있었다. 코트에 목도리까지. 눈이 오기에 목도리는 특히 더 북슬거리는 것으로 골랐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오면 병원이었다. 추위에 몸을 떨며 얼른 따뜻한 곳을 가기위해 걸음을 빨리 하고 있던 로우는 목도리 때문에 병원 정문의 계단이 얼어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정확히 얼어있는 계단을 밟고 급하게 발을 뗐다.




"어?"




로우는 지금 자신의 얼굴이 붉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자주 얼굴을 봐왔던 외과의 교수가 로우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 자네도 보이지.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그래도 겨울에 그만큼 넘어져서 이만큼 다친거면 운이 좋아.




"한달정도 물리치료 받으면 되겠네. 반깁스 불편하다고 함부로 풀어버리면 치료 한달이상 걸려"




발목에 찬 깁스붕대를 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발 가져가게. 무슨 인대에 목발입니까. 인대니까 더 필요한거야. 한숨을 쉬고 목발을 집어들었다. 쪽팔려. 진료실을 나왔더니 기다리고 있던 쿠레하 교수가 다가온다. 비웃을줄 알았던 교수가 아무 말이 없다. 로우가 쳐다보자 쿠레하 교수가 로우의 발목에 시선을 뗀다.




"기말고사까지 2주 남았나"


"네"


"그럼 더이상 ER수업은 하지않으마"




쿠레하 교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로우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비웃음은 나보다 히루루크에게 들어라. 쿠레하 교수가 자리를 비키자 교수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던 대기의자에 닥터가 앉아있다. 그의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부터가 비웃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냥 웃어 닥터.


병원에 있을 동안은 동기들의 도움으로 쉽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가 문제였다. 일단 계단 내려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목발을 잘못 짚어 발목에 무게가 쏠려 몇번이고 주저앉을뻔했다. 무슨 인대 다친게 더 번거로워. 결국 또 동기들의 도움으로 계단을 내려와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막상 정류장까지 오니 버스 타기가 무서워졌다. 사람도 많고 앉기도 힘들고 타고 내릴 때의 계단 경사가 심한 버스를 탄다니. 로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일단 제일 만만한 고물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바쁘냐"


-어


"진짜 바쁘냐? 나 도와주지도 못할만큼?"


-왜?


"발목다쳤는데 버스를 못 타겠어"


-아, 미안하다. 나 곧 회의 들어가. 니 애인한테 연락해봐.


"알았다"




전화를 끊고 로우는 키패드를 두드렸다. '홍학'이라고 번호가 뜬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면서 도피는 더욱 더 바빠졌다. 몇일동안 집을 비울 때도 있었고 밤 늦게 나가는 건 이제 흔한 일이었다. 바쁠까봐 연락하기를 계속 고민하던 중에 문자가 온다.


[바쁠까봐 머뭇거리면 존나 기집애]


개새끼. 결국 통화버튼을 누른다. 전화연결음이 들리는 그 와중에도 혹시도 안 받으면, 받았어도 바쁘면 어떡하나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택시비라도 있으면 타고 갔을텐데 그 마저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연결음이 끊긴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말을 꺼내야 하는데 멍해져 할말을 잃는다. 전화 반대편에서 도피의 목소리가 들린다. 로우, 왜, 무슨 일 있나? 그제서야 로우가 정신을 차린다.




"바빠?"


-왜?


"발목을 다쳐서 버스를 못 타겠어서. 택시비도 없어"


-어디야? 병원?


"병원 앞 버스정류장"


-곧 갈께. 기다려




한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도피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려 깁스를 한 로우를 보자 인상을 잔뜩 쓴다. 어쩌다 다쳤어. 계단에서 미끄러졌어. 도피가 혀를 찬다. 조심 좀 하지 그랬나. 핀잔을 주면서도 앉아있는 로우를 일으켜 조수석에 태운다. 목발을 뒷좌석에 두고 운전석에 탄다. 




"얼마정도 있어야한대?"


"한달정도"


"그때까지 내가 차 태워줄께"


"바쁘잖아"


"괜찮아"




다친 것도 마냥 나쁘지는 않군. 로우가 다시 깁스 찬 발을 쳐다보았다. 도피도 발을 보더니 한숨을 쉰다. 난 또 누가 부러뜨린줄 알았잖아. 도피의 말에 로우가 웃는다. 난 그만한 원한관계 없어. 그냥 문신보고 시비거는 놈들도 있어. 도피가 조금은 진지해보여 로우가 손을 들어 핸들을 잡고있는 도피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아.







*


어두운 사무실에 여기 저기에 서류들이 늘어져있다. 어느것은 붉은색의 도장이 찍혀있기도 했고 몇몇개는 찢어져있었다. 서류가 쌓여있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사람과 그 옆에 서있는 여자가 보인다. 여자의 손에도 두터운 서류 하나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졸업한거에요?"


"그래. 지금은 집에서 의사국고시 준비해. 그런데 모네. 로우 안부 물으려고 나한테 온거냐?"


"아뇨. 여기 이번에 시작한 사업 피드백과 대안들, 그리고 사업체들의 요구사항들이요"




도피가 모네에게 서류를 받아들어 펼친다. 또 책상에 서류더미들이 쌓인다. 빠르게 훑더니 책상 한켠에 놔둔다. 됐어 가봐. 모네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간다. 도피가 의자에 깊에 몸을 기댄다. 새로운 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던 중 여러 일들이 터졌다. 예전에 한번 자신이 협상에 참여했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하고만 이야기를 하겠다는 사업체들이 많아졌다. 그 부분을 겨우 수습했더니 소홀히했던 새로운 사업에서 일이 생겼다. 거기가 업친데 덮친격으로 산하 조직 중 하나가 배신을 했다. 결국 부족한 인원을 몇 풀고 조직의 기밀 몇개를 빼간 놈들을 찾고있다. 덕분에 집에 들어가 자본 것이 손에 꼽는다. 바쁜 와중에도 물리치료로 병원을 다니는 로우를 태워줘야했다. 그때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차를 바꿔서 타고 나간다. 저번에 바빠서 못 태워줬던 날에 다른 여자의 차를 타고 온 로우와 말다툼을 한 이후에는 아무리 바빠도 자신이 태워주었다.




"조커"




사무실을 문을 열고 베르고가 들어온다. 기대어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시계를 확인했다. 입을 안 열던가. 베르고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전에 배신한 조직원 중 한명을 잡았다. 정보 캐는 것을 베르고에게 맡겼지만 잡힌 조직원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산하조직인만큼 독하게 키운 녀석들이었다. 십분. 그 이후에는 로우에게 가봐야해. 도피가 발을 옮겼다. 건물의 지하에 있는 고문실에 들어가자 아직도 정신이 멀쩡해보이는 남자 하나가 보인다.




"뭐야. 제대로 한거냐?"


"잘 키워진 놈이다"


"잘 키워져봤자.."




도피가 가죽 장갑을 낀다. 손을 몇번 쥐락펴락 하더니 얇은 줄을 집어든다. 도피가 소름끼치게 웃었다.




"결국 내 밑이잖아?"







*


"이제 풀어도되는데 아직 겨울이고 특히 발목이니까 조심해야 돼"


"네"




로우가 자유로워진 발목을 움직였다. 진료실을 나와 걷는 발이 가벼웠다. 병원에서 나와 눈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평소라면 주위에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을 도피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늦나싶어 벤치에 앉았다.







*


가죽장갑에 묻어있는 피를 털어냈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올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엉망진창이 된 사내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피는 기분좋게 웃으며 커다란 집게를 들었다. 이번에는 이를 빼내볼까? 남자의 눈에 두려움이 차오르며 비명을 지른다.




"더 아프기 싫으면 불어"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도피가 더 기쁘게 웃는다. 그렇다면 내 즐거움을 위해서. 남자의 턱을 억세게 쥐어 입을 벌렸다. 손을 통해서 그의 몸이 떨리는게 느껴진다. 훗훗훗. 남자의 어금니를 집게로 집는다. 다시 괴성이 터진다. 집게를 잡은 손에 힘을 주려는데 베르고가 도피의 어깨를 잡는다.




"조커. 전화"




도피가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며 집게를 바닥에 던진다. 가죽장갑도 벗어 테이블에 놓고 베르고가 건내는 폰을 받아든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인상을 잔뜩 쓴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젠장. 다들 입 다물고 저 새끼 천 같은걸로 입막아"




부하 중 하나가 더러운 수건으로 남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제서야 도피가 통화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도피 안 와?


"가야지. 미안 많이 기다렸나?"


-바쁘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께 마침 동기 한명 만났고


"아냐. 지금 갈테니까 절대 그 놈 도움 받지 마"




도피가 전화를 끊고 베르고를 쳐다본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 베르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빠르게 방을 빠져나온다. 급한대로 정장자켓만 갈아입고 차에 올라탄다. 최대한 빠르게 차를 몰아 로우의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 앞 정류장에 차를 세우자 벤치에 앉아있던 로우가 일어난다. 언뜻 보이는 발목에 깁스가 없었다.




"깁스 풀었네"


"어. 이제 병원 안 와도 돼. 이때까지 고마웠어"




도피가 웃으면서 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해야할거였어. 로우도 덩달아 웃는다. 집에 도착해 침대에 늘어지게 누운 로우의 발목을 도피가 만지작거린다. 더이상 아프지 않은건가? 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가야해? 응. 로우가 몸을 일으켜 방의 한켠에 있는 핫팩을 가리킨다. 그럼 저거 좀 주고 가. 도피가 몸을 일으켜 핫팩을 건내자 로우가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잘다녀와"




로우의 이불을 여며주고 도피가 몸을 일으킨다. 다녀올께. 도피가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간다.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이불 안에 뒀던 손을 꺼냈다. 손 끝에 묻은 끈적한 붉은 액체. 냄새를 맡았더니 비릿한 쇠냄새가 난다. 분명히 피다. 차에 탈 때부터 시체 썩은 냄새와 살이 탄 지독한 냄새가 나 당황했던 터였다. 거기다 시계에 묻은 응고되지 않은 피.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았다. 한참 밖을 보고있으니 차 한대가 빠져나간다. 자신이 모르는 도피의 또 다른 차. 로우는 다시 손 끝을 바라보았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