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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험기간 때보다 훨씬 더 어지러운 방 한가운데 로우가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손에 쥐고 있는 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졸업식도 마쳤다. 곧 있을 의사국가고시 준비로 로우 또한 도피 못지 않게 바빴다. 도피는 로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일이 풀려 시간이 생겼는데 로우는 바빴다.



"왜? 용건있어?"



도피가 문가에 있던 것을 눈치 챘는지 로우가 고개를 돌린다. 도피가 끼고있던 팔짱을 풀고 로우에게 다가갔다. 내가 집에 있어서 번거로운가보지? 별로. 그러고는 로우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도피는 크게 숨을 내쉬고 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일만 마무리되면 이제 한가해. 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언제 나가? 지금. 로우가 다리 고개를 들어 도피를 위아래로 훑는다. 정장 차림. 여전히 핑크색 포인트의 아이템. 오늘은 반지였다. 잘 다녀와. 집 잘보고 있어. 도피가 몸을 돌린다. 배웅 나가줄까? 됐어, 공부해. 방을 나가는 도피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책에 고개를 박는다.

한참 보던 책을 내려놓고 시계를 확인했다. 도피가 나간지 한시간 좀 안됐다. 로우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거의 쓰지 않는- 침대 헤드 사이를 뒤적거렸다. 손에 잡히는 물체를 꺼낸다. 손바닥만한 PDF 전원버튼을 누른다. 키드에게 부탁해서 뒷골목에서 산 위치추적기였다. 대도시용. 도피가 숨겨둔 차키에 몰래 추적기를 붙였었다. PDF가 켜지고 위치수신중이라는 창이 뜬다. PDF를 책상에 놓아두고 옷장에서 외투를 꺼내 입는다. 두꺼운 코트를 껴입고 책상위에 놓인 기계의 화면을 확인한다. 위치는 여기서 그리 멀지않은 소규모 항구의 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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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리자 바다냄새가 난다. 짠내나는군. 도피의 말에 베르고가 바닷가를 바라본다. 장소도 구린 곳을 골랐군. 도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 도피를 괴롭혔던 일 중 가장 까다로운 일의 종지부였다. 새로운 사업과 기존의 사업체들의 불만사항, 마지막으로 배신한 조직. 배신자의 우두머리인 녀석의 꼬리가 잡히지않아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그렇게 찾던 녀석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대부분의 조직원을 잃은 지금 상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겠지. 상대가 어떤 카드를 내보일지 궁금해 웃음이 나왔다.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오랜만이야 대장"


"배신자 주제에 대장은 무슨. 그동안 잠은 잘 잤나 티치?"


"물론 아주 잘"



티치가 생긴 것과 똑같이 게걸스럽게 웃는다. 도피도 마주 웃어주긴 했지만 선글라스에 가린 눈은 전혀 웃고있지 않았다. 배신한 이유가 뭐야. 도피의 질문에 티치가 입꼬리를 올린다. 전부터 무척 탐내던 사업을 대장이 먹어버렸잖아? 도피가 고개를 기울인다. 탐내던 사업? 그래. 티치가 웃는다.



"그 사업 우리에게 넘겨주셔야겠어"



도피가 웃음을 터트린다. 말을 꺼낸 티치가 무안해질정도로 크게 웃던 도피가 일순간 웃음을 멈춘다. 내가 왜? 나에게 이득이 뭔데. 도피의 비웃음에도 미소를 잃지않던 티치의 눈이 번뜩인다. 창고에 들어왔을 때부터 쥐고있던 기계를 눈높이까지 들어올린다.



"이 기계에 저장해 둔 코드가 있어. 그걸 입력하면 내가 고용한 킬러들에게 사살명령이 내려지지. 참고로 망가트려도 명령은 전송 돼"


"킬러? 누구를 죽이려고. 내가 조직원 몇명 죽는다고 그 사업 포기 할 것 같나?"


"아아. 얼마전에 우연찮게 안 사실인데, 조커. 귀여운 꼬맹이 하나 데리고 살던데? 걱정마. 이런 귀중한 정보를 다른 조직에 팔아먹을 수 있나? 우리만 알고 있다고. 사업 넘기면 입 다물어주는 건 서비스로 해주지"



도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다.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에 대한 정보는 뒷세계 그 어느 조직도 모르니까. 조직내에서도 특히 로우에 관한 것은 최측근 중에서도 측근만 아는 사실이었다. 우연찮게 알게되었다는 건 미행이라더 했다는건가. 이런데도 사업을 넘기지 않을건가. 거만함이 잔뜩 묻은 티치의 질문에 이를 간다.



"넘기겠다"


"좋아! 지금 당장 계약서를 쓰지"



티치 쪽의 부하가 책상과 종이 세장을 가져온다. 도피가 입술을 물었다. 먼저 티치가 계약서를 쓴다. 세장 모두 사인을 한 후에 도피에게 건넨다. 도피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려하자 티치가 가로 막는다. 이 펜을 써. 도피는 혀를 차고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티치가 주는 펜을 받아 살펴본다.



"펜도 너답게 싸구려를 쓰는군"


"곧 당신만큼 좋은걸 쓸거- 악!!!!!"



도피가 티치의 오른팔뚝에 펜을 박아 넣는다. 그리고 재빠르게 티치를 잡아채어 넘어뜨린 뒤 손에 쥐고 있던 기계를 빼앗는다. 일어나려는 티치의 명치를 발로 눌러버린다.



"베르고 코드 풀고 해산 명령 내려"



기계를 베르고에게 넘기고 총을 꺼내어 티치의 허벅지에 쏜다. 일단 짜증나니까 한발. 돼지멱따는 소리와 같은 비명이 들린다. 도피가 즐겁게 웃는다. 부하들은 먼저 죽여주지. 말이 끝나자마자 총성이 들리고 힘아리 없는 몸들이 쓰러진다.



"조커 네이놈!!!!!!"


"돼지 같은 게 어디서 남의 것을 넘봐. 거기다 내 꼬마녀석으로 협박까지 해?"



그대로 티치의 머리를 발로 차버린다. 곱게는 못 죽이지. 자켓 안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든다. 정신을 못차리는 티치의 팔을 들어 길게 선을 긋는다. 피가 솟구쳐 흐른다. 손에 끈적하게 묻는 피를 털어내고 버둥거리는 다른 한 팔도 잡아 긋는다. 자, 세팅완료. 손을 털어 피를 떨구고 손수건으로 닦는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도피에게 장갑과 말채찍을 건넨다. 장갑을 끼고 말채찍을 든 도피가 티치에게 다가간다.



"피 흘릴 시간이다, 돼지"



도망치기 위해 몸을 질질 끄는 티치의 등을 후려친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티치가 몸을 돌려 도피를 바라본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이 도피를 기분 좋게 한다. 다시 팔을 들어올리자 티치가 맨손으로라도 막아보려는 듯 손을 뻗어 허우적거린다. 채찍으로 허우적거리는 팔을 때리자 피가 튄다. 도피가 소름끼치게 웃는다.

피투성이가 된 도피의 입에서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정신을 잃은 티치의 얼굴에 물을 붓는다. 얼마 안 있어 티치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돼지 기회를 주지. 도망쳐라"



말이 끝나자마자 티치가 힘겹게 일어나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도피가 기분 좋게 웃는다. 이내 큰소리로 배를 부여잡고 웃는다. 탕. 도망치던 티치의 몸이 꼬구라진다. 도피가 얼굴에 느껴지는 끈적함에 손을 들어 뺨을 만진다. 손에 피가 묻어나온다. 돼지의 피가 묻었군. 코드는 풀었나 베르고. 어둠속에서 베르고가 나타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지. 발을 옮기려는데 조용한 가운데 '털썩'하는 소리가 난다. 도피가 빠르게 소리가 난 곳으로 총구를 겨눈다.



"...로우?"






*

택시에서 내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무역업 같은 걸 하는거였나. 확실히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유혈사태가 있을지도 몰랐다. 밀수입자들과 싸운다던가 그런식으로. 로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PDF 안의 반짝이는 점을 바라보았다. 점을 따라 걷자 도피의 차가 보인다. 제대로 왔나보군. 눈 앞에 보이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비명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웃고있는 도피가 보이고 그의 발밑에 피투성이의 남자가 보인다. 도피 또한 피투성이였지만 자신의 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걸어간다. 도피가 큰소리로 웃더니 남자의 등에 총을 쏜다. 총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쓰러진다. 로우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피. 총. 살인. 웃음.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사람이 도피가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몸을 돌린 도피의 핑크색 반지까지 확인하면서 로우의 바람은 깨졌다. 저 사람이 도피라고 인식하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주저앉으면서 나는 소리에 도피가 빠르게 총구를 로우쪽으로 겨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총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로우?"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로우는 몸을 일으켜 밖을 향해 달렸다. 무작정 큰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조직 폭력배였나. 혹시나 비밀을 알아버린 자신도 죽일까. 근데 왜 굳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던걸까. 밀려오는 실망과 두려움, 분노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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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로우를 따라가려 했으나 베르고가 붙잡는다. 피투성이다. 베르고의 말에 멈춰서 피가 묻어있는 손을 바라본다. 젠장. 일단 돌아가자. 도피가 몸을 돌려 창고를 빠져나갔다.

피묻은 옷을 버리고 깨끗이 씻고 돌아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피는 휑한 거실에 앉았다. 로우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숨기고 있던 일을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 들켜버렸다. 순간 로우의 눈에 스쳤던 감정 중에 두려움이 컸던 것을 생각해냈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떻게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찾으러 다녀도 되는걸까. 찾을때 부하들을 써도 되는걸까. 혹시 찾았다가 자신이 무섭다며 이별을 선고하지는 않을까. 로우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까. 도피는 찬찬히 로우가 갈만한 곳을 떠올렸지만 마땅한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피는 무력함에 눈을 감았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