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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는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다시 한가해졌다. 다시 타투이스트일을 할 수 있었다. 한동안은 밀린 손님들로 바빴지만 이제 그 마저도 없었다. 일이 없으면 떠오르는 기억에 머리가 아팠다. 그 일이 있던 이후로 로우가 있을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로우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가장 꺼려하던 녀석을 만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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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에게 무슨일이 있던겁니까"



사납게 물어오는 키드에 도피가 혀를 찼다. 너에게 말해줘야 할 이유는 없어, 너도 로우가 어디있는지 모른다면 됐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키드가 도피를 잡는다. 언젠가의 상황과 무척 비슷해 짜증이 났다. 누구보다 로우를 잘 알고 로우와 가까운 녀석. 로우가 무척 아껴서 도피는 키드에게 털끝 하나 손댈 수가 없었다. 로우만 아니었으면 반 죽여놓았을 녀석이었건만 이렇게 물어볼 수 밖에 없은 상황이 답답하다.



"왜, 또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으면 못 보내주는건가?"


"잘 아시네요. 사정을 이야기 해주신다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도피는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확실히 이제 남은건 키드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로우가 더 중요했기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키드에게 간략하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범죄조직과 산하조직의 배신, 그 징계 과정을 본 로우. 마지막 사람을 죽인 부분을 교묘하게 고문으로 바꾸어놓긴 했지만 나머지는 사실이었다. 키드가 가만히 듣더니 미간을 찡그린다.



"고문보다 더한 거 했었죠?"


"뭐?"


"사람을 죽였다거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는 말에 도피가 짧게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키드가 조금 고민하는듯 하더니 입을 연다. 로우는 의대생이에요, 시체 같은 것도 많이 봐왔고 해부학을 제일 좋아하는만큼 잔인한 것에 반감을 가지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문장면 하나 가지고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을겁니다. 키드는 또 도피가 모르는 로우의 모습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을거다? 네. 도피가 한숨을 쉰다. 맞아. 키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에 놓인 핫초코를 단번에 마시고 일어난다.



"얘기만 듣고 내빼겠다 이건가?"



키드가 입고있는 외투를 정리하더니 도피를 바라본다. 생각 정리하면 알아서 제 발로 찾아갈겁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세요. 혹시 화나있으면 조금 받아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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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한동안 놓고있던 스케치북을 펼쳐서 훑는다. 그림의 반 이상이 로우에 관련된 그림이었다. 로우의 크로키이거나 로우에게 어울리는 문신들. 그 중 옛날에 로우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문신을 쳐다보았다. 한숨이 나온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이 답답했다.



"도련님. 오늘은 가게 일찍 닫을까요?"


"왜?"



그게... 말 끝을 흐리는 모네를 바라보았다. 모네가 가게 입구를 바라보더니 일찍 닫을께요라고 말하고는 이내 자리를 비킨다. 도피가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홀 입구에 그렇게 찾던 얼굴이 보인다.



"로우"



도피는 재수없긴해도 로우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예측한 키드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벌써 3주가 지났다. 로우는 조금 말라있었다. 얼굴도 상해있었고. 그리고 전에 본 적도 없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헤어지자고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로우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피의 턱을 가격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도피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화나있으면 받아주라는게 이거였나. 도피가 작게 웃는다. 로우가 손을 뻗어 도피의 멱살을 틀어쥔다. 아직도 그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그 조직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어"






*

홍등가. 윤락촌. 사창가. 매음굴. 환락가. 도피는 그렇게 불리는 곳에서 태어났다. 보통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어미가 누구인지 알건만 도피는 그마저도 몰랐다. 골목의 쓰레기통에 버려져있는 것을 한 가게의 마담이 데려다 키웠다. 도피는 7살때부터 가게 일을 도왔다. 청소를 하고, 물건들을 나르고. 도피는 또래들과 다르게 키가 훨씬 컸다. 마담이 먹이는 것 또한 잘 먹인지라 체구도 꽤 있어 이제 13살인데도 거의 십대후반 수준의 키였다. 덕분에 가게에 시비가 붙으면 힘이 좋은 도피가 손님들을 쫓아내고는 했다. 그것을 본 한 조직폭력배가 도피를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으로 데려갔다. 그 때부터 도피는 싸우는 법을 배우며 컸다. 잔심부름부터 큰 일들까지 도맡아 하던 도피는 두목의 신뢰를 받았다. 그렇게 그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조직의 간부가 되었다. 



"앙? 후계자? 그건 니가 상관할 게 아니다"


"아니 나와 아주 관련이 깊은거지"



간부가 되고 1년 후 어느날, 도피는 조직원 중 그 누구도 모르게 두목을 찾아갔다. 후계자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두목을 반응은 예상했던대로 차가웠다.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피는 웃으며 물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뭐냐"


"방금 당신이 마신 물에 타 놓은 독의 해독제"



도피의 말이 끝나자 두목의 눈이 커진다. 네놈이!! 두목이 총을 잡기 위해 주위를 더듬었다. 소용없어 총은 내가 다 치워버렸거든. 비상벨? 그것도 신호 끊어놨어. 소름끼치게 웃는 도피를 보며 두목이 이를 갈았다. 원하는게 뭐냐. 이제야 말이 통하네. 도피는 미리 준비해뒀던 종이를 건넸다. 날 후계자로 지목해, 그러면 이 해독제를 주지. 두목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유서에 후계자로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라고 적고 사인했다. 자 이제 약을 줘. 도피가 약을 건내자 빼앗듯이 받아들어 단숨에 마신다.



"하하하하! 넌 아직 허술하군. 이딴 종이 해독제 마시고 찢어버리면-"



두목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이제는 도피가 웃었다. 허술하군, 애초에 독 따위는 없었어. 그게 독이지. 도피는 방에서 벗어났다. 다음날 두목의 죽음으로 조직은 발칵 뒤집혔다. 무엇보다 후계자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회의용 테이블의 가장 끝에 앉은 도피가 왈왈 짖어대는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불만있나?"


"그래! 아직 어린 놈에게 조직의 두목이라니 인정할 수 없다!"


"할말은 그게 끝인가?"



도피가 미소지었다. 그럼 안녕. 총으로 그를 쏜다. 또 이의 있는 사람? 그 이후로 도피의 후계자 상속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간혹 몇몇이 뭉쳐서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도피의 최측근으로 재빠르게 처단되었다. 도피는 조직을 이어받자마자 기존의 사채업은 버리고 마약과 총기 거래에 뛰어들었다. 엄청난 사업 수완으로 빠르게 성장한 그의 조직은 몇년만에 뒷세계 브로커의 탑이 되었다. 그 쯤부터 도피는 거리의 아이들을 거두어 키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도피만을 바라보는 충실한 조직원이 되었다. 모네와 베이비5도 그 때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문신?"


"네. 도련님은 그림 잘 그리시잖아요. 전부터 계속 심심하다고 하셔서. 어떠세요?"



한참 조직일이 잘되어 할 것도 없을 때 모네의 권유로 타투이스트일을 배웠다. 바늘을 살갗에 박아 넣는 느낌이 마음에 들어 타투샵을 운영하기로 했다. 일반인들과 마주쳐야했기에 도피는 그 때부터 조커라는 가명을 쓰고 얼굴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컸던 홍등가 근처에 가게를 만들어 간혹 오는 몸파는 여자들에게 문신을 해주었다. 그렇게 입소문이 흘러 도피의 가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면서 그 주위에 언더문화가 형성되었다. 그게 지금의 뒷골목이었다. 






*

로우가 한숨을 쉰다. 다사다난한 인생이었네. 도피가 로우의 반응을 보고 웃었다. 말하라고 해놓고 왜 다 듣고나서 미안한 척이야. 로우는 대답없이 도피가 뺨에 대고 있는 얼음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많이 아파? 도피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왜 화난거였어? 도피의 질문에 로우가 입술을 꾹 물더니 입을 연다.



"숨겨서"




도피가 짧게 웃엇다. 너도 안 그래보이는데 꽤 다혈질이군. 몸을 일으켜 로우의 옆에 앉는다. 로우를 껴안자 한숨이 들린다. 도피는 로우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하지마"


"응"






*

"로우는 진짜 머리가 좋구나"



아, 이름 까먹었다. 특이한 안대를 한 꼬마여자아이가 포도를 먹으며 로우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로우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책에 눈을 뒀다. 시험준비로 보지 못했던 소설이었다. 변호사가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살해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내용이었다. 로우가 앉아있는 테라스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시험에 합격하고 도피의 권유로 휴식차 조직의 '본거지'라고 하는 곳에 왔다. 말이 본거지이지 실상은 바닷가 옆의 으리으리한 별장이었다. 



"그거 알아? 조커는 피를 좋아해"



로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이 별장에 오고나서부터 줄곧 들어오던 것이였다. 그들이 보아온 도피의 모습에 대해서 고자질 하는마냥 이것저것 말해주는 부하들 덕분에 로우는 도피가 얼마나 잔인하고 이상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생각을 정리한 로우는 그에 대해 별 신경쓰지 않았다. 로우의 싱거운 반응에 심심했던지 아이가 자리를 떠난다. 로우는 책을 덮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 창고에서 도망쳐나와 갈 곳이 없던 로우는 고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려서 또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시골까지 들어가니 그제서야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나서 처음 온 집이었지만 로우는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있었다. 그렇게 방 안에서 꼼짝도 안하다가 마을의 잔치가 있던 날 어머니의 성화로 겨우 밖으로 나왔다. 마을은 소란스러웠고 로우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돼지 한마리를 데려와 잔치의 마지막 관례를 행하고 있었다. 돼지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었고 마을사람은 익숙하게 돼지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무런 죄책감없이 돼지를 죽이는 마을사람들을 보며 로우는 자신의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어렸을 적 자신 또한 돼지가 죽는 모습을 보며 그 고기를 먹을 생각에 웃었다. 그 곳에서 그 행위에 반감을 가진 것은 다른 도시에서 온 키드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몇일을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무슨 생각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온건지 도피가 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우는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돼지 생각. 로우의 대답에 도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웬 돼지? 몰라. 로우가 무릎 위의 책을 탁자에 던져두고 앉아있던 소파에 눕는다. 도피는 그런 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로우의 위에 올라탄다.



"뭐해"


"여기 경치 좋지?"


"경치 좋은 거랑 지금 이 자세랑 무슨 상관이야"



도피가 입꼬리를 올린다. 로우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귓바퀴를 살짝 문다. 움찔거리는 로우의 몸이 느껴지자 소리내서 웃는다. 경치좋은 곳에서 하면 더 좋을거야. 그런 말 있잖아, 야외플레이. 로우가 허탈하게 웃고는 도피의 뒷목에 팔을 감는다.



"여기에 아무도 안 오는 거 맞지?"


"물론"



도피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춘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