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필독 (클릭)








*


돈키호테 도플라밍고와 트라팔가 로우. 두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친하기에 마주앉아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두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앉아있는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집안 어른들의 압력. 로우아 도피, 두사람은 서로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동시에 입을 연다.




"싫은데요"


"싫습니다"




잔뜩 긴장하고있던 어른들이 이마를 짚었다.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을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에 차질이 생길줄이야. 싫다해도 어쩔 수 없어.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노파의 말에 로우가 죽상이다.




"할머님. 결혼 안한다고 말씀드렸지않습니까"


"예끼이놈! 외아들인 놈이 결혼하지 않으면 어찌하자는게야!"




로우가 입을 꾹 다문다. 망할 종가. 로우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도피가 작게 웃는다. 정략결혼. 주혼자가 제 이익을 얻으려고 당사자의 뜻을 무시하고 억지로 결혼시키는 일. 소설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좋다는 건 아니고. 도플라밍고, 너는 또 왜 싫으냐. 목소리의 주인은 이 자리에 같이 왔던 큰아버지였다.




"이런 꼬마한테 관심없어요"


"나도 당신같은 아저씨한테는 관심없어"




너무한데 꼬마, 아직 31살이라고. 도피가 상처받은 척하며 말하자 로우의 눈이 커진다. 당신 정말 얼굴이 늙었군. 로우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도피가 쏘아붙인다. 꼬마가 보기에는 사회경험으로 성숙해진 얼굴을 판단하기 힘들겠지. 이제는 로우가 인상을 쓴다. 자꾸 꼬마라하는데 댁이랑 4살차이밖에 안 나. 도피가 이를 간다. 한마디도 지지않는 로우가 괘씸했다. 사실 저는 결혼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다만 수염에 문신까지 한 시커먼 남자가 싫었을뿐. 아니 그것도 그리 문제될 건 아니었다. 제일 기분이 더러운 건 절대로 자신이 어떤 종인지 보여주지 않는 철저한 방어막. 모르는 사람이보면 그는 완벽한 원숭이였다. 아무리 관찰해봐도 도저히 무슨 종인지 모르겠다. 가문의 특성상 고양이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만 꽁꽁 숨기고 있는 모습이 재수없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나름 인연인데 좋게 좋게 가면 안되나?"


"누가 당신이랑 좋은 관계 원한답니까?"




엿같은 꼬마. 도피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회의에 늦는다. 곧 회의라서요. 도피가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는 걸음을 옮긴다. 방을 나가기 직전 도피가 뒤를 돌아 로우를 보고 기분나쁘게 웃는다. 엿 먹어봐라 건방진놈.




"결혼 하도록 하죠"







*


로우는 쓰러질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상대방도 싫어하는 의사를 내비추어 어쩌면 결혼을 취소시킬수도 있겠다 했는데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편두통이 일어 침대에 누워 망연자실해 있는데 유일하게 이 가문에서 얘기가 통하는 펭귄이 방으로 들어온다. 펭귄이 누워있는 로우의 옆에 와 앉는다.




"많이 낙심했습니까?"


"좌절이다"


"이제 저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네요. 상대방도 저렇게 나온 이상 빼도박도 못하게 됐어요"




펭귄마저 손을 들었다. 자신의 편이 아예 사라진 것 같아 로우가 몸을 웅크린다. 왜 결혼을 피하십니까. 집안에서는 따로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있어요. 아니면 키드 도련님 때문이세요? 펭귄의 말에 눈을 감는다. 딱히 애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키드도 신경은 쓰였지만 그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로우는 집안어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로우"


"왜"


"사정이 있다면 털어놔요"


"너에게?"


"아니요 결혼하실 분이요"




로우가 벌떡 일어났다. 미쳤나? 아까 말하는 꼬라지 듣지 못했나보지? 잔뜩 흥분한 로우를 펭귄이 진정시킨다. 그렇게 나쁜사람 아닌 것처럼 보이던데요. 사람 좋은 펭귄의 말에 로우가 다시 침대에 눕는다. 나가 혼자있을거야. 펭귄이 짧게 숨을 뱉더니 이내 몸을 일으킨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로우. 펭귄이 나가자 핸드폰을 꺼낸다. 주소록 즐겨찾기의 제일 위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몇번가더니 이내 여보세요라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강의 끝났으면 얼굴 좀 보자"




전화가 끊기고 로우가 몸을 일으켜 차키를 챙긴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가서 점심이라도 사줘야겠군.







*


"결혼해"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성의없게 하냐"




고기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로우를 향한다. 그 눈빛에는 딱 '귀찮게 그런거 물어보지말고 고기나 쳐먹어' 라고 적혀있었다. 로우가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들었다. 로우의 앞에 앉아있는 로우의 이복동생, 유스타스 키드는 로우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 붉은머리에 찢어져있는 눈에 우락부락한 몸까지. 닮은거라면 둘 다 이과계열이라는 것 정도. 키드는 발명경연대회 따위에서 수상실적이 꽤 되는 기계공학과 수재였다. 두사람이 다르게 생긴 이유는 둘 다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왜 결혼하기 싫은데? 키드가 고기 한점을 집어먹는다.




"결혼하면 너 못만날까봐"


"웃기지마. 진짜 이유가 뭐야"


"형한테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괜히 말에 꼬리를 잡으며 대답을 하지 않는 로우를 키드가 째려본다. 로우가 어물쩡하게 넘어가려하자 급기야 키드가 로우의 정강이를 차버린다. 말해. 위협적으로 말해오는 키드의 모습에 결국 로우가 두손 두발 다 든다. 한번 물면 놓지않는다. 짐승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로우가 물 한모금 마시더니 입을 연다. 어른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고 이렇게 나오는게 이상해서. 말을 바꿔? 이제 키드는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때부터 거의 세뇌수준으로 들어왔던 말이 뭔지 알아?"


"뭔데"


"넌 절대 결혼하면 안된다"




남의 눈에 띄면 안돼. 로우의 말에 키드가 눈살을 찌푸린다. 로우는 고기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로우의 어렸을 때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어렴풋하게 아는 키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말없이 고기를 구워먹다가 키드가 뭔가 생각난듯 고개를 든다.




"나 호주 가"




로우가 놀란듯 쳐다보자 키드가 뒷머리를 긁는다. 호주에 있는 대학원에서 장학금 준다고 와라던데, 비행기값도 없고 생활비 벌기도 빠듯해서 거절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근데 얼마전에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 들어와서 가게됐어. 로우가 다시 고기로 시선을 박는다. 용돈 필요하면 연락해.




"근데"


"어"


"형 결혼식 보고 가고싶네"




그 순간 로우는 정말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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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선생님. 찾으시는 분이 있는데요"




간단한 수술을 마치고 막 퇴근하려할 때 간호사 하나가 다가왔다. 찾으시는 분? 환자도 아닌 사람이 병원에서 의사 찾는 건 뭐하는 짓인가. 로우가 가운에 손을 찔러넣고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갔다. 손님에게 수술복 그대로 보여주는 건 실례겠지만 병원으로 찾아온 거 뭐 어쩔도리가 있던가. 사무실 문을 열자 말끔한 정장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설마.




"무슨일입니까?"




로우의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드디어 왔네. 웃으면서 쓰고있던 선글라스를 벗는다. 로우가 한숨을 쉬고 책상으로 다가간다. 책상 위의 서류들 중 가져갈 것이 있는지 뒤적거리다가 아무말도 없는 도피가 신경쓰여 고개를 든다. 제 얼굴 보려고 여기온겁니까? 도피가 어깨를 으쓱인다. 짐 챙기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 대충 서류를 가방에 쑤셔놓고 사무실 라커룸 안의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도피는 그런 로우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의사집안의 외아들이라해도 27살에 이만한 사무실은 과하다. 더군다나 간호사들의 얘기나 책상위의 서류들을 훑어보면 수술전문 외과의다. 천재라는 말이 헛소문은 아니었군. 책상위에 놓인 로우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아까 가지고 들어간 옷은 캐주얼. 가방은 메신저백. 젊군. 도피는 웃었다. 네살차이임에도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자신과 로우였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후드를 입은 로우가 나온다. 메신저백을 매고 도피를 바라본다.




"용건이 뭡니까"


"진짜 결혼 하기 싫은가 그거 물어 물어보러온거야. 정말 싫다면 다시 얘기해 볼 수 있어"




로우는 입술을 씹었다. 내가 떠나면 혼자잖아. 한명이라도 어떻게든 누가 옆에 있었으면 해. 키드의 말이 머리속을 헤집는다. 혼자서는 그 어떤것도 해결되지않아. 물론 가만히 있는 것도. 깨지더라도 일단 누군가랑 부딪혀봤으면 좋겠다.




"할겁니다"




도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이만. 로우가 발을 옮기는데 도피가 로우의 팔을 붙잡는다. 




"결혼할거라면 용건이 또 생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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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가 데려온 곳은 결혼 후에 같이 살 집이었다. 도피도 종갓집의 엄격한 분위기는 싫었고 로우 또한 벗어나고 싶었기에 집안어른들도 동의했겠다, 도피는 너무 마음에 들어 덜컥 샀지만 너무 커 살지 못했던 곳이라며 이 집에 로우를 데려왔다. 거실이 통유리로 된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 로우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에 붙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신이 나서 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안방으로 추정되는 큰 방은 통유리는 아니어도 벽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다.




"저기에 침대를 둘 생각이야"


"이 방을 당신이 쓰겠다고요?"


"같이 쓸 거 아니었나?"




로우가 인상을 쓴다. 저랑 같이 침대에서 자고싶습니까? 도피는 말없이 자신보다 작은 남자의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아쉽지만 이 방 양보해드리죠. 한숨을 쉬더니 로우가 자리를 뜬다. 도피는 귀여워질까했더니 다시 재수없어진 로우를 보며 혀를 찼다. 괜히 결혼한다했어. 집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난 뒤에 도피는 로우에게 저녁식사를 권했다. 도피는 로우가 또 재수없게 굴면서 거절하면 결혼이고 뭐고 다 파기시켜버릴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도피를 놀리듯 로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날짜는 언제로할까"


"최대한 빨리요. 준비되는대로 였으면 좋겠습니다"


"좋아. 근데 왜 갑자기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거야"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어두워지는 로우의 표정에 도피는 자신이 혹시 무례한 질문은 한것인가 고민했다. 머뭇거리는 로우를 보며 도피가 말을 덧붙였다. 말하기 어려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말하고 싶어요. 도피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로우를 바라보았다. 




"이복동생이 있는데, 사정이 있어서 내쳐졌다가 몇년전에 다시 만났습니다. 집안에서 그 녀석을 만나는 것에 눈치를 주긴했는데 신경 쓰지 않았어요. 처음에 결혼을 반대한건 결혼하면 그걸 빌미로 그녀석을 못 만나게 할까봐 그랬습니다. 아무튼 올해 대학 졸업 하는데 호주의 대학원에서 스카웃 받았습니다. 떠나기전에 결혼하는 모습이 보고싶다네요"




도피가 짧게 숨을 뱉었다. 왜 그렇게 벽을 쌓나 했더니 마음이 여려 자기방어를 하는거였군. 도피는 물을 한모금 마셨다. 




"어려운 얘기 고맙다"


"아닙니다. 사정도 얘기하지 않은 제가 죄송했어요"


"밥먹고 술이나 한잔하러 갈래?" 




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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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친해졌나보네"


"어. 생각보다 재수없지는 않아서"


"형은 어리게 생겨서 정장 잘 안어울려"




로우가 키드의 다리를 걷어찼다. 피로연장은 북적거렸고 키드의 신음은 묻혔다. 로우는 모른척하며 샴페인을 마셨다. 출국 언제냐. 태연하게 질문하자 키드는 오만상을 쓰면서도 대답한다.




"내일모레"


"앞당겨졌네?"


"먼저가서 좀 놀려고"




키드다운 생각에 로우가 웃는다. 그래 가서 좀 재밌게놀고 용돈 떨어지면 연락하고. 떨어지기 전에 넣어줘. 키드와 로우가 마주보고 웃었다. 


약속이 있는 키드를 배웅해주고 피로연장으로 돌아왔을때는 어느정도 한산해져있었다. 조금 지쳐보이는 도피가 로우를 끌고다니며 남아있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후에야 이 번잡스러운 행사를 끝낼 수 있었다. 이미 가구를 다 채워놓고 짐까지 정리한 아파트에 돌아와서 둘은 그대로 늘어졌다.




"두번은 못할 짓이군"




로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내일모레 동생 출국이야. 도피가 고개를 들어 소파에 누워있는 로우를 바라봤다. 그러고보니 동생을 못봤군. 굳이 봐야하나. 물론. 그럼 같이 마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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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는 로우와 전혀 닮지않은 붉은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거기다가 늑대. 고양이 집안에서 절대 들이지 않을 조건이군. 일단 악수를 청했다. 돈키호테 도플라밍고다. 유스타스 키드입니다. 맞잡힌 손이 크다. 정말 비교되는 형제로군.




"두분은 신혼여행 안 갑니까?"


"일단 지금은. 언젠가는 가겠지"




키드는 로우를 바라보았다. 형 미안한데 나 사야할게 있어서. 뭐, 내가 사올께. 키드가 기다렸다는듯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낸다. 부탁할께. 로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찍이 사라진다. 로우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달라진다. 도피는 그런 키드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은근슬쩍 이빨을 드러내는게 영리하다.




"전 당신이 마음에 안듭니다"


"왜지?"


"그렇게 철저하게 감추는게 재수없어요. 반류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들어요"




도피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자신이 로우에게 느낀 감정을 그의 동생이 자기에게 느낀다니. 반류는 맞아. 하지만 혼현은 감춰야하는 사정이 있어. 근데 나도 그 말을 네 형에게 하고싶거든. 도피의 말에 키드가 악수하던 손을 푼다. 형은..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이 수상쩍다.




"사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상처도 많습니다. 잘 안 맞더라도 조금은 신경써주세요"


"대단한 형제애군"


"아무쪼록 저희 형,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하는 태도가 글러먹었어. 도피는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도, 상처도 많다라. 복잡한 종갓집의 사정에 잘 못 발을 담궜나. 도피는 조금 후회했다. 신혼여행은 형이 거절했죠? 키드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워졌다. 집에서 좀 쉬고싶다더군. 키드가 한숨을 쉬고는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로우를 바라보았다. 이 대화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래.




"둘이 무슨 얘기했어?"


"그냥 호주얘기"




로우가 사온걸 키드에게 내민다. 키드가 내용물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가볼께. 키드가 도피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린다. 키드가 게이트로 들어간 후에 로우가 몸을 돌린다. 이제 집에 가서 좀 자야겠어. 아아 나도. 두사람이 공항을 빠져나간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