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류는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한번에 구별해내잖아"


"응"


"정략결혼을 했는데 맞지않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후계자 만들고 외도를 하는거지"




도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 침대에서 나와주지 않겠나? 로우가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어 도피를 바라보았다. 싫은데. 그러면 나도 침대에 눕게 해주던가. 싫은데. 도피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선뜻 방을 양보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했다. 로우는 도피가 늦게 오는 날이면 항상 도피의 전망좋은 침대를 차지했다. 그건 상관이 없었지만 문제는 자신이 침대에 있을 때는 절대로 도피를 침대에 들이지 않았다는 것. 거실도 전망이 좋다고 타일러봐도 그는 꼭 침대를 고집했다. 여기가 편해. 덕분에 집에 와서도 도피는 소파에 몸을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너네 호랑이 가문이잖아. 가주는 당연히 호랑이가 맡는거고"


"그래서"


"너도 호랑이인건가"




로우가 도피를 바라보았다. 설마 외아들인데 호랑이가 아닌건가. 도피의 말에 로우가 다시 책에 고개를 박는다. 호랑이였다면 내가 당신과 결혼을 하지 않겠지. 도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중간종인가? 로우가 한숨을 쉰다. 후계자가 가지고 싶은건가? 아니면 뭐 한바탕 구르고 싶은건가? 왜 자꾸 그런 얘기를 하지? 도피가 어깨를 으쓱한다.




"너의 혼현이 궁금하거든"


"무례한 짓 하지마"


"보고싶다고 안했어. 궁금하다는거지"




로우가 몸을 일으키더니 빠르게 방을 빠져나간다. 짜증나서 못 있겠군. 도피가 그제서야 일어나 침대에 눕는다. 하루에 한번은 로우와 크건 작건 말다툼을 한다. 자신이 우위를 차지하면 그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되지만, 그 반대라면 한없이 기분 나빠지는 일이 된다. 그래서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더 불리하기 때문에. 다행히 로우는 먼저 시비를 거는 타입이었다. 방금처럼. 혼자 흥분해서 쏘아붙인다. 도피는 그런 로우의 모습을 보는게 꽤 즐거웠다. 그렇게해서 침대에서 쫓아내는 것도 재미있었고. 도피는 작게 웃었다.


방으로 돌아온 로우는 들고있던 책을 거칠게 책상위로 던졌다. 신경질적으로 이불속으로 파고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펭귄을 통해 로우는 집안어른들이 왜 자신을 결혼시킨 것인지 알게되었다. 돈이 필요했던 이름뿐인 자신의 집안과 종가들의 인맥이 필요했던 돈뿐인 도피의 집안. 결국 자신은 팔린 것이다. 심지어 도피는 고양이인도 아니었다. 가문에 전례없던 다른 종과의 결혼이었다. 그들은 후계자 같은 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로우는 이를 갈았다. 







*


"도망가고싶다"


"어르신들이 좀 답답하기는하죠"




딱딱한 비늘로 된 꼬리를 단 꼬마가 펭귄의 다리에 매달린다. 펭귄이 웃더니 아이를 안아든다. 눈동자도 파충류의 눈. 악어냐. 로우의 말에 펭귄이 고개를 끄덕인다. 히그마 왜 밖에 나와있어요? 꼬마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웃는다. 아빠가 오기로 했어요. 로우가 그런 둘의 모습을 봤다가 몸을 돌린다. 난 간다. 펭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소아병동에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간다. 규모가 크지않은 병원이라 수술전문의인 로우는 거의 일이 없었다. 집안어른들의 압박으로 외래진료는 불가능했고 수술전문의도 로우의 실력이 출중했다면 불가능했을 자리였다. 그마저도 일이 거의 없었지만. 도피의 집안에서 후원을 받아 병원의 규모가 확장된다면 자신의 입지는 또 어떻게될까. 정말 여기에서 도망치고싶었다. 왜 진작에 도망치지 않았을까.


옥상에서 내려와 의국의 가장 구석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간호사 한명이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로우가 다가가자 파리한 안색의 간호사가 고개를 돌려 로우를 바라본다. 트라팔가 선생님! 이사회의에 호출되셨어요. 왜 간호사의 얼굴이 죽상인지 알 것 같았다. 로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회의실에 다다라 노크를 하고 문을 연다. 그 곳에는 보기만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영감들이 일곱명이나 앉아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보이지않던 사람이 보였다. 자신의 배우자, 도플라밍고.




"드디어 주인공이 왔네요"




도피의 말에 영감들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는다. 무슨 사고를 치려고. 로우가 도피를 째려보자 도피는 그저 웃는다. 도피가 자신 옆의 빈자리를 가리킨다. 앉아. 로우는 말없이 도피 옆의 자리에 앉는다. 




"저희쪽에 하나 남은 이사자리. 트라팔가 로우에게 위임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이사직을 맡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내과과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로우는 편두통으로 머리가 아팠다. 내과과장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반대의 의견을 낸다. 이유는 다양했다. 27살이라는 어린 나이. 아직 제대로 위치가 잡혀있지 않은 수술전문의. 외래진료에 대한 경험이 없음. 기업체의 사람이어야함. 당연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났다. 반대의 이유 중 반이 그들이 만든 상황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있던 도피가 어느정도 의견이 나오자 다시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댁들보다 실력이 뛰어난 건 쏙 빼고 말하네"




회의실이 술렁인다. 이제 로우는 자신의 사물실 첫번째 서랍의 진통제가 절실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쓰러질지도 몰랐다. 로우는 몸을 일으켰다. 요란하게 의자소리를 내며 일어난 덕분에 시선이 다 로우를 향한다. 로우는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자리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오늘부로 병원 관둘겁니다. 사직서는 곧 올리도록 할테니 이만"




로우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거의 뛰듯이 사무실로 돌아와 첫번째 서랍을 열었다. 하얀 약통을 열었지만 약이 없다. 전에 다 먹고 더 가지고 오지않았던것이 기억이 났다. 미칠듯한 두통을 겨우 참으며 한층 더 아래에 있는 간호사실로 향한다. 식은땀을 닦고 최대한 태연하게 간호사실로 발을 들인다. 저들끼리모여 대화를 나누고있던 간호사들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로우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황급하게 몸을 일으킨다. 무슨일이세요? 진통제 받으러 왔습니다. 아아 잠시만요. 간호사 한명이 창고로 들어가더니 약통을 건네어준다. 두통만 더 줄 수 있나요?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두개를 더 가져나온다. 약을 받아들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약을 꺼내어 입안에 쑤셔넣는다. 목구멍으로 겨우 알약을 넘기고 소파에 몸을 잔뜩 말아 눕는다.




"가관이군"




발소리가 들리더니 머리맡에서 멈춘다. 사그라들지않는 두통에 로우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누구인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죽을것같은 이 두통이 사라지길 바랐다.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까 서서히 두통이 옅어진다. 견딜수있을 정도가되자 그제서야 눈을 떴다. 눈 앞에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도피가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도피가 손에 쥐고있던 약통을 탁자에 놓아둔다. 로우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도피가 손을 뻗는다. 그대로 누워있어 좀비가 깨어나는 것 같아서 보기싫으니까. 다시 몸에 힘을 풀고 소파에 몸을 펴 눕는다. 그거 무슨 약이야. 도피가 고개짓으로 약통을 가리킨다. 당신이 알 거 없어. 계속 그딴식으로 말할거면 물어 뜯어버린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로우가 한숨을 쉰다. 한 번 물면 놓지않는 짐승들. 로우는 그 짐승들에게 넌더리가 났다. 




"진통제야"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서나 쓰는 독한 약을 먹는거지?"


"두통"




이제 완전히 가신 통증에 로우가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갔다. 서랍들을 뒤져 사직서를 찾는다. 제일 아랫서랍에서 겨우 찾아내 몸을 일으킨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그런 로우를 도피는 그저 바라보기만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병원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사직서를 내밀자 미묘하게 기쁜얼굴을 했다. 이제 뭐할거냐. 예의상 물어오는 목소리가 역겨웠다. 로우는 입술을 한번 꾹 물고 최대한 밝게 웃었다.




"내조나 할겁니다"







*


애초에 인수인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수술전문의는 로우 하나뿐이었기에. 짐 조차 많지 않아 로우는 몸은 가벼운 몸으로 병원을 나왔다. 사직서를 내고오니 사무실에 도피는 없었다. 집에 도착해 로우는 자연스럽게 도피의 침대로 올라갔다. 엎드려 누우면 마치 하늘 위에 누워있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항상 도피가 오기전까지는 멍하게 밖을 바라보았다가 도피가 오면 그제서야 책을 읽었다. 드넓은 바다에 간간히 검은 점 같이 배가 보인다. 병원을 나오니 후련하면서도 공허하다. 평생을 의사라는 직업만 바라보고 살았다. 의학공부는 숨막히는 집안에서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제 뭘 해야하나. 해가 지면서 곳곳에 빛이 들어온다. 로우는 일어나기 귀찮아 어두운 방안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곳에서 뭐해. 놀랐잖아"




불이 켜지고 도피가 투덜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넥타이를 풀어 탁자에 던져버리고 소파에 앉는다. 조금 지친듯한 모습에 로우가 몸을 일으킨다. 침대 양보해줄께. 오늘은 어떻게 실랑이를 벌일까 고민하던 도피는 로우의 반응에 멍해졌다. 하루의 재미 중 하나가 사라졌다. 방을 나가려는 로우의 팔목을 잡았다.




"건들지마!"




로우가 도피의 손을 쳐낸다. 도피도, 로우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미안, 지금 좀 예민해서. 그렇게 말하며 로우는 고개를 숙였다. 도피가 소파에서 일어나 로우에게 다가간다. 손을 들어 로우의 뺨을 감싸 고개를 들게한다. 꽉 쥐고있는 손. 안 그런척 하지만 입안의 여린살을 뜯고있는 모습. 도피가 손을 뗀다.




"몸이 닿는 것을 싫어하는군"




도피는 몇번 로우와 몸이 닿았던 것을 떠올렸다. 철저한 자기방어에, 스킨쉽을 이렇게 싫어하면서 이때까지 참고있던 인내심, 은근슬쩍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병원의 이사들, 두통으로 독한 진통제를 먹던 모습. 이렇게 자신을 참고 억누르며 불쾌한 시선을 참아내는데 몸의 어디 하나가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피가 한숨을 쉬었다. 잠은 잘 자나?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못자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이 방에서 자. 혹시라도 편하게 잤다면 내가 이 방을 양보하지"


"그런 호의 필요없어"


"내가 너에게 좋은 마음으로 이러는 것 같나?"




착각하지마라. 이렇게 어디 한쪽이 병신이었으면 결혼 거절했어. 이미 했으니까 책임지는 것 뿐이다. 도피가 옷가지를 챙겨들고 방을 나간다. 


로우의 방은 단조로웠다. 단지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을뿐. 책 외에는 짐이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도피는 키드의 말이 떠올랐다. 사정도, 상처도 많은 사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건지 가늠이 되지않아 짜증이 솟구쳤다. 왜 로우가 결혼을 반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복동생은 핑계일뿐 실상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던거다. 무덤을 판 것은 도피 자기 자신이였다. 







*


"피곤해보이는군"


"신경꺼"




도피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가 바꿨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 쥐고있던 서류들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대표이사나 되는 녀석이 이런 의뢰서 맡기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닐텐데. 피고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꺼버린다. 관능적으로 웃으면서 다리를 꼰다. 잠자리가 만족스럽지않나? 도피가 짧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럽지않지, 온통 책에 둘러쌓인 방에서 자는 건 곤욕이더군. 남자가 웃는다. 바라는게 뭐야.




"트라팔가 가문에 대해서 알아봐줘"


"네 배우자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정확하게는 트라팔가 가문의 트라팔가 로우에 대해서"




남자가 흥미로운듯 턱을 괸다. 그 가문은 왜. 그건 니가 신경쓸게 아니야 크로커다일. 남자가 크게 웃는다. 언제까지 얼마만큼 알아봐주면되나. 도피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다. 지금부터 두시간, 트라팔가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도피는 탁자에 쌓여있는 종이뭉치들을 바라보았다. 바로크워크스. 겉으로는 평범한 기업이었지만 기업가 뒷편에서는 정보거래 기업으로 탑인 곳이었다. 도피는 로우가 태어났던 병원의 기록을 집어들었다. 다른 아이들과 다름이 없는 병원일지에 바닥으로 던져버린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부 평범했다. 도피는 눈살을 찌푸렸다. 같이 묶여있는 로우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았다. 의욕도 생기도 없는 흑발의 꼬마. 집안에서 폭력이라도 당했던 것인가.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로우의 과거에 머리가 아프다. 도대체 어떻게 굴러먹은 가문이야. 도피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뭉치를 던졌다. 이마를 짚고 대학교 기록을 보던 중에 크로커다일이 들어온다.




"놀라운 가문이야"


"짜증나니까 용건만 말해"


"거기 자료 전부 위조된거다"




크로커다일이 책상 위의 자료들은 전부 쓸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그러더니 종이 한장을 탁자에 올려둔다. 그녀석에 대한 기록은 이게 전부다. 이 이외에는 기록이 없어. 이것도 기밀중의 기밀을 겨우 빼낸거라고. 도피가 종이를 들어 읽었다. 태어난 병원에서는 태어난 날짜와 시각, 이름 빼고는 자료없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전부 검정고시. 18살에 의대입학 성적은 전부 에이플러스. 졸업 후에는 줄곧 지금의 병원. 가문에서 전례없는 고양이목이 아닌 반류와의 결혼. 도피가 허탈하게 웃었다.




"감옥에 살았군"


"가문에서 거의 인간 취급도 못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어"


"왜?"




그건 우리도 알아내지 못한 부분이야. 덕분에 그 가문에 흥미가 가서 말이야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다. 도피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은 곧 입금하지. 크로커다일이 다시 로우에 대한 자료를 쳐다본다. 트라팔가 로우, 27세. 혼현 알수없음.




"당신의 정체가 뭘까, 이상한 나라의 로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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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 두사람의 집은 이 사진에서 따왔습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