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피는 차에서 내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전과 다르게 확실히 규모가 커졌다. 그 전이 그저 빌딩 하나의 병원이었다면 이제는 거의 대병원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이 큰병원에 로우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게 조금 씁쓸했다. 이제 완전히 내 사람으로 보고있군. 도피가 작게 웃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 집안이라 명성이 있다보니 병원을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북적이는 로비 -화려하기까지했다- 를 훑어보았다. 반류관할 건물로 발을 옮긴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꼬마 하나와 부딪힌다. 넘어진 꼬마아이를 일으켜주자 해맑게 웃는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뒤돌아서 다시 뛰어간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인다. 강아지군. 도피가 웃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중간에 올라가면서 간호사 몇명이 탄다. 도피는 무료하게 시계를 확인했다. 이사회의까지는 20분 좀 넘게 남았다. 




"저기..."




도피가 시선을 돌렸다. 한 간호사가 어쩔줄몰라하며 자신을 본다. 무슨일이시죠? 조금 머뭇거리는듯 하더니 간호사가 입을 연다. 트라팔가 선생님은 잘 지내시나요? 이 병원에 트라팔가 선생님은 수십명인걸로 아는데요. 도피의 말에 여자가 당황하더니 더듬거리며 로우의 이름을 말한다. 자신이 로우와 결혼한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니. 도피가 최대한 상냥하게 웃었다. 네, 잘지냅니다. 여자가 기쁜듯 웃더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은근히 인기가 좋았나보네. 도피는 가만히 로우를 떠올렸다. 호주에서 다녀온 후로 조금 멍해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처음 같이 살 때보다는 안정감을 찾은 로우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확장한 이후 처음 온 곳이었기에 도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회의실을 찾았다. 베르고라도 데려올걸 그랬나. 그러나 다른 일을 하러간 그를 떠올리고는 이내 생각을 지운다. 별 시설이 없는 층이라 회의실은 금방 찾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15분 좀 안되게 남았다. 도피는 회의실 문고리를 잡았다. 살짝 문을 여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무시하고 들어가려했지만 순간 들리는 '로우'라는 이름에 행동을 멈춘다.




"그녀석은 가문의 수치야"


"쓸데없이 머리가 좋아서 병원에 들어와 난리가 나지 않았나"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조상님이 그런 저주를 내리셨는지"


"그러게말일세"




평소에도 나오는 말이기에 도피는 다시 잡은 문고리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어떻길래 가문에서 저정도의 취급을 받는건지. 도피는 혀를 차고 회의실에 발을 들였다.




"혼현이 없다는 것이 말이되나"


"뭐라고요?"




대화를 나누던 두사람이 고개를 돌린다. 도피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자네, 어디까지 들었나. 도피는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머릿속에는 혼현이 없다는 말만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도피가 한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대로 말하세요. 으르렁거리는 도피의 뒷편에는 어렴풋이 날개가 드러났다. 혼현을 보자 그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횡설수설 말을 잇는다. 우리도 잘 몰라, 혼현이 없다는 얘기만 전해들었어. 혼현을 볼 줄 알기에 가문에 들이고 있었을뿐이야. 결혼은 우리도 통보받은거라네. 미안하네, 돈키호테. 이러지말게. 도피는 이를 갈았다. 쥐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오늘 이사회의는 다음으로 미루죠"







*


로우는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두껍게 깔린게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 바깥을 보는 건 일단 관두고 책이라도 읽을까싶어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가려는데 오토락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난다. 로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에는 일할텐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도피가 거실로 들어온다. 무슨일이야라고 말하려는데 단숨에 목덜미가 잡힌다. 순간적으로 숨통이 막히자 고통이 섞인 짧은 숨을 뱉어냈다. 로우가 당황스러워 도피를 올려다보았다. 그 어느때보다 화나 보이는 그 표정에 불안함이 엄습한다.




"너.. 혼현 뭐야"




로우의 입술이 마른다.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도피는 흔들리는 로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인가.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숨이 막혀 켁켁대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대답해, 혼현이 뭐야. 로우가 고개를 젓는다. 모른다? 가르쳐즐수없다? 아니면 혼현이 없다? 로우가 손톱을 세워 도피의 팔을 긁는다. 숨이 막혀? 도피가 차갑게 웃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목구멍 주제에. 로우를 바닥으로 내팽겨쳐버린다. 




"솔직히 말해. 너 혼현이 뭐야. 말 못하겠으면 고양이건 뭐건 꺼내봐란말이야"




로우의 양어깨를 쥐었다. 떨리는 몸이 느껴진다. 아무거나 말해, 되는대로 말해, 고양이라고 말이라도 해. 속으로 그렇게 외쳐대지만 로우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서움에 몸을 떨면서 입을 열지 않는다. 도피는 피가 끓는 느낌에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악! 로우가 고통에 몸무림친다. 로우는 혼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도피를 바라보았다. 손까지 바뀌어 날카로운 발톱이 날개뼈근처에 박힌다. 




"너 혼현이 없어? 제대로 얘기해, 니 입으로. 혼현이 없던거냐 로우?"




슬픔, 두려움, 혼란, 억울. 온갖 감정이 머리속을 뒤흔든다.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견디기 힘들어 결국 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등에 박혀있던 발톱이 빠진다. 동시에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등의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뺨에 고통이 느껴진다. 뺨 하나 맞았을뿐인데 입안이 터졌다. 로우가 고개를 들자 도피가 로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다시 뺨을 때린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난다. 도피가 로우를 벽으로 던져버린다. 로우는 이제 육안으로 드러나도록 몸을 떨었다.




"니가.. 감히... 어떻게.... 혼현을.."




도피가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다시 로우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다. 그 반동으로 테이블에 부딫혀 이마가 찢어진다. 죽을지도몰라. 로우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도피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그의 팔을 낚아채어 있는 힘껏 물었다. 도피가 고통에 손을 빼자 로우는 그 틈을 타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도망친다. 도망치는 로우를 쫓아가려 몸을 돌리는데 도피의 눈에 벽에 흥건하게 묻은 핏자국이 스쳤다. 그 순간 발이 멈춘다. 고개를 돌리자 거실부터 현관까지 로우의 피들이 이어져있다. 그제서야 자신이 로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머리속에 들어온다. 도피가 이마를 감싸쥐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선명한 핏자국이 자꾸 도피의 눈을 찔렀다.


로우는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무작정 뛰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한참을 정처없이 뛰는데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지자 그제서야 뛰던 걸음을 멈춘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이내 그 수가 많아져 쏟아져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몸을 적시고 피들을 씻어낸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물이 차오른다. 로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갈 곳이 없어. 웅크린 몸에 얼굴을 묻으며 로우는 울었다. 등 뒤에서는 흘러나오는 피가 계속 빗물에 씻겨져 내려갔다.







*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닥치고 얼른 치료해"




남자가 팔짱을 끼고 로우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분주하게 가지고 온 치료도구를 꺼내들었다. 상처부위를 닦아내고 소독을 한다. 지혈제로 피를 멈추게 한 후 실과 바늘을 꺼내 꼬맨다. 이마까지 치료를 마치고 자잘한 상처들에 꼼꼼하게 연고를 바른다. 어느정도 치료가 끝나자 피 묻은 손을 수건에 닦는다.




"당신은 누구고, 로우는 왜 이런겁니까"


"이녀석이 왜 이렇게 된건지는 곧 알게될거고, 내 이름은 알 필요없어"




치료 끝났나? 그럼 데려가지. 남자가 로우를 안아든다. 의사가 남자의 팔을 잡는다. 제가 모시고 있을 겁니다. 남자가 실소를 터트린다. 가문에 소속되어 본가에 사는 주제에 어떻게 이녀석을 돌봐. 주제를 알아야지, 살쾡이씨. 의사가 입술을 짓씹는다. 로우가 깨어나면 안부 전해주세요. 남자는 대답없이 몸을 돌렸다. 의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집안은 여전히 치워지지 않았다. 곳곳에 흘려졌던 핏자국들은 이제 검게 얼룩이 져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풍인듯 창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도피는 소파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로우는 어디로 갔을까, 비는 피했을까, 상처는 치료했을까, 어디선가 죽어있지는 않을까.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혼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펭귄이라는 녀석이 말한대로 고양이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병원을 나왔다.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에도 제발 거짓말이길 그들이 잘 못 알고있는 것이길 빌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혼현에 대한 로우의 반응이 혼현이 없다는 그 사실로 다 이해가 되자 이제 배신감이 들었다. 집으로 와 로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분노가 일었다. 그 때부터 이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목을 틀어쥐었다. 처음 물었을 때 대답이 없자 거의 짐승 마냥 화가 났다. 조금이라도 남은 이성이 그 때 무언가를 한 것만도 같았는데. 결국 로우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거의 고문수준으로 대답을 끌어냈다. 로우가 고개를 끄덕였을때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완전히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 로우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그 생각에 도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로우를 찾아야할지, 그냥 내버려둬야할지 거기서부터 머리가 아프다. 애초에 정략결혼이었고 마음을 주고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로우는 자신을 그저 동거인 정도로만 볼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이라면 굳이 찾아가야할까. 자신의 존재가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이 아닐까. 호주에서 로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한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던. 가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 혼현이 없어 저주 취급을 받던 로우에게 유일한 탈출구. 자신은 로우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그랬다면 더 비참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에게 이만한 폭력을 당했다.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이제 로우의 삶이 가까이 다가왔다. 모든게 맞아 떨어졌다. 왜 그렇게 숨겨져있는 것이 많았고 집안에 가두어 키웠는지. 기억이 시작할 때부터 갖혀지냈던 아이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로우의 몸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자살도 시도하지 않고 견뎌온 그 삶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이 되지않는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걸까. 모르지도 않았는데, 단편적으로라도 이야기를 들어왔었는데. 왜 무자비하게 내쳐버린걸까. 집안의 압력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참아오며 가슴 졸이며 자신의 옆에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자신에게 얻어 맞는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배신감은 로우가 아니라 그 집안어른들에게 느껴야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반대했던거구나.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승락한걸까. 동생 때문에 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일찍이 거짓인줄 알았다. 하지만 안일하게 생각했던 다른 이유가 사실은 너무 크고 무겁다. 들키는 것이 두렵고, 집안어른들에게 휘둘리는게 서럽고, 결혼하는 상대방을 배신하기 싫고. 4살 어리다고 마냥 어리게만 보고 있었는데 실상은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있었다. 


자신은 분노에 휘둘려 건방지고 무식하게 굴었다. 내가 너의 옆에 있어도 되는걸까. 내가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줄까. 도피는 죄책감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 옆에 있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도피는 몸을 일으켰다.







*


크로커다일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물컵을 들어 방으로 들어간다.




"마셔"




로우가 컵을 받아들어 마신다. 흠. 짧게 숨을 뱉은 크로커다일이 로우의 옆에 앉는다.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로우는 다 마신 빈 잔을 나이트테이블에 놓고 눕는다. 이제야 겨우 눕는군. 크로커다일의 말에 로우가 토해내듯 웃는다. 아직 똑바로 눕지는 못해. 크로커다일이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로우의 날개뼈 근처를 만지작거린다. 묘한 부분에 상처가 났어. 로우가 몸을 더 웅크린다. 목에 난 손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손을 옮겨 목 언저리를 안마하듯 꾹꾹 누르나 로우가 손을 떼어낸다. 아파. 이렇게 해줘야 빨리 사라지지. 로우가 몸을 돌려 크로커다일과 눈을 마주친다.




"나한테 이상하게 친절한데"


"마음에 드니까"


"나도 도플라밍고처럼 침대 파트너 해줘야 하는건가?"




크로커다일이 웃는다. 그쪽은 같이 뒹군게 한손에 꼽는 녀석이야. 그리고 난 아래라고. 나는 당신이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지 모르겠어. 로우의 눈동자가 크로커다일을 직시한다. 부담스러워. 그렇게 생각하며 크로커다일이 손으로 로우의 눈을 가려버린다. 언젠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거야.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간다. 또 소리죽이고 울지말라고. 이따 저녁 때 오지.


로우는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 때 빗속에서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을 때, 놀랍게도 크로커다일이 나타났다. 죽을셈이냐. 그렇게 말하며 그는 로우를 일으켜세웠다. 차에 타자마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 집이었다. 처음에는 탈진할 정도로 울었다. 식사도 거르고 울고 또 울고. 크로커다일은 그런 로우의 옆에서 말없이 시가만 피웠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는 그 때를 떠올리지 않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등이 아파 눕지 못하고 웅크려 자던 것도 상처가 꽤 아물어 모로 눕는 것까지는 가능하게 되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사고 할 수 있게되자 크로커다일은 무덤덤한 어조로 이 때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 알아보고싶은 정보가 있어 부하를 시켜 자신을 미행했던 것. 덕분에 죽기 직전의 자신을 거두어 데려올 수 있었다고 했다. 치료를 해야했지만 진료기록이 남으면 안되기에 뒷조사로 알아본 자신을 잘 따르는 펭귄에게 연락해 치료를 하게 한 것. 로우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묘하게 도피의 이야기가 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또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아 관뒀다. 크로커다일은 도와준 대가로 로우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원했다. 로우는 성심성의껏 기억나는대로 크로커다일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그는 역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듯 했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렀다. 얼마나 흐른지는 알수가 없다. 밖은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자신은 날짜를 확인 할 수 있는 도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확인해볼 생각도 없었고. 


로우는 시간이 가는 것이 무서웠다. 상처가 다 나은 후에는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기에.







*


빗방울이 직선으로 떨어져 우산에 닿아 사라진다. 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머리가 아프다. 넓은 마당의 돌길을 따라 걷다가 더이상 비가 닿지 않는 곳에 와서 우산을 접었다. 시종인이 손을 내밀어 우산을 받아간다. 집 안에 발을 들이자 또 다른 시종인이 도피를 안내한다. 가는 내내 도피는 입 안의 혀를 굴렸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할지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를 한다. 시종인이 발을 멈추더니 가만히 서서 문을 연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로우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집안어른 대부분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로우의 할머님이 앉아있었다. 도피가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하고 유일하게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는 들었네"


"그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태어났을 때부터 혼현이 없는겁니까.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보시지는 않으셨나요? 했네. 해결하려는 노력은요. 다 실패했어. 그래서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겁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하니 모두들 고개를 가로젓더군. 그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결국 우리는 의사집안이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무당, 주술사 다 찾아가봤어. 그 곳에서는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네. 저주에 걸렸다라고. 그래서 어린아이를 그렇게 가혹하게 키운겁니까. 분가로 보내거나 버릴 수도 있었네, 그러지 않은것은 그녀석 애비가 목숨을 끊으며 유서에 아이를 여기에 두라했기에 그런거야.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도피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런 말로는 당신들이 로우에게 행한 폭력이 정당화가 되지않아요. 정당화할 생각따위는 없네. 도피는 머리가 아픈듯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자네는 이혼을 원하는건가?"


"아니요"


"그러면 무엇을 원해서 여기에 온겐가"


"로우의 행복이요"







도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조금은 약해졌다. 우산을 펼치려는데 옆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고개를 돌리자 펭귄이다. 도피가 씁쓸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펭귄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도피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때린 이유를 알 것 같아 도피는 그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인사치례는 이쯤이면 됐겠지. 로우 어딨어"


"가르쳐 드릴 것 같습니까"




도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살쾡이 주제에 건방지게 기어오르지마. 펭귄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로우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한겁니까. 도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네가 상관할 게 아니야.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로우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을겁니다. 잔말말고 말해, 더이상 폭력은 쓰고 싶지 않으니까. 펭귄이 이를 간다. 제가 로우를 당신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럴 자신 있어요! 도피가 펭귄의 멱살을 잡는다. 네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펭귄이 지지않고 또박또박 얘기한다. 로우를 사랑하니까요. 펭귄의 멱살이 놓아진다.




"너는 혼현이 없는 로우도 사랑할 수 있나"


"네?"


"로우는 혼현이 없어. 그런 로우도 사랑할 수 있냐고"




펭귄의 눈이 커진다. 도피가 잡아먹을듯 펭귄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류의 종족번식 본능을 억누르면서 까지 사랑할 수 있냐고 물었다. 펭귄이 고개를 떨구었다. 로우가 혼현이 없다니. 도피는 혀를 차고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난 그래도 사랑해. 그러니까 로우 있는 곳 당장 불어. 







*


"뜯어져버린 날개 자국"


"낯간지러운 말 하지마"


"위치나 상처모양이나 딱이야"




크로커다일이 시가 연기를 뱉어냈다. 꼬매기는 했어도 상처자국이 흉한 등을 바라보았다. 로우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 아직 목의 멍은 남아있지만. 크로커다일은 신기한듯 로우의 상처를 꾹꾹 눌렀다. 절묘한 위치군, 정말. 로우는 민망함에 셔츠를 내렸다. 등에 상처 보려고 들어온거야? 크로커다일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네가 좋아하는 홍차 사왔어. 로우는 이제 말해준 적도 없는 자신의 취향을 아는 그의 정보력이 놀랍지않았다. 처음에는 계속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을 해 크로커다일이 짜증을 내기도 했었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자 브랜드까지 정확히 맞춘 홍차가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틀렸네"


"뭐가"


"티백은 취향이 아니거든"


로우가 홍차 티백 하나를 뜯어 컵에 넣는다. 미리 끓여져있던 뜨거운 물을 부어 홍차가 우려나오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건 내가 아니라 도플라밍고가 좋아하는 차야. 그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티백을 몇번 흔들고는 빼서 쓰레기통에 버려버린다. 그렇게 묽게 타서 마시나? 오렌지향을 좋아하지않아 그런 것이지만 굳이 크로커다일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몇모금 마시고 컵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역시 취향이 아니야. 




"뜨거워"


"식으면 마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로 가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크로커다일이 로우를 보더니 방을 가리킨다. 로우는 홍차가 담긴 컵을 들고 느릿하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곧바로 그 방의 테라스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자 아주 조금의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빗줄기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차를 마셨다. 사실 미리 찬물을 타 놓아 뜨겁지는 않았다. 옅게 탔어도 코를 자극하는 오렌지향에 또 눈물이 맺힌다. 그 향을 없애기 위해 컵 안의 홍차를 아예 다 마셔버린다. 하지만 이제는 입 안에 오렌지향이 가득하다. 컵을 내려놓고 밖을 바라보았다. 호주였나, 바깥을 보는 버릇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자 차가운 기운이 이마에 퍼진다. 




"잠깐!"




바깥에서 크로커다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일인가 고개를 돌리는데 방문이 열린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에 다리가 풀린다.




도피는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기다리니 크로커다일이 나온다. 무슨일이야. 로우 있는거 다 알아. 크로커다일이 비웃듯이 미소짓는다. 알면 뭐? 만나게해줘. 이제 크로커다일은 문가에 기대어 도피를 바라보았다. 또 등에다가 구멍 뚫어 놓으려고? 도피가 미간을 찡그린다. 크로커다일이 소리내서 웃더니 몸을 비킨다. 들어와. 집 안에는 정적만 흐른다. 크로커다일은 등 뒤에서 도피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도피는 그 미소가 무슨 뜻인지 알아 이마를 짚었다. 알아서 찾아보라는거군. 도피는 집 안에 있는 방들을 한번 훑고 발걸음을 뗐다.




"잠깐!"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도피가 웃었다. 바로 맞췄군. 문을 열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주저앉는다. 도피는 로우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추었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줄까. 로우는 도피가 가만히 서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쁘면서도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자신을 찾아와준 것은 기뻤다. 하지만 혹시, 혹여나 자신과 끝을 내기 위해 온거라면. 로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몸을 일으키려하는데 도피가 다가온다. 더욱 더 몸이 떨려 일어나기는 커녕 몸을 웅크린다. 도피는 로우와 한발자국 거리에 멈춰서 몸을 숙여 로우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로우.."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가가 뜨거워진다. 내가 무서워? 도피의 물음에 기어코 눈물을 떨어트린다. 무서워, 아니 무섭지 않아, 아니 너무 무서워, 근데 안 무서워. 입 안에서만 맴도는 말 대신 눈물만이 나와 로우의 말을 대신한다. 도피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로우의 눈물을 닦는다. 최대한 손가락이 안 닿게 조심 조심 눈물을 덜어낸다. 도피의 눈에 로우의 목에 난 멍자국이 밟힌다. 죄책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미안해.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전한다.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로우가 고개를 든다. 떨리는 팔을 뻗어 도피의 옷깃을 잡았다.




"떠나지마.. 당신..이 없으면... 내 옆에 아무도 없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떠나지마, 내 곁에 있어 줘. 이제 혼자인건 싫단말이야. 당신이 같이 있는 즐거움을 가르쳐 줘놓고 떠나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로우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도피는 로우를 끌어당겨 어깨을 감싸 안았다. 떠나지않아, 계속 네 옆에 있을께. 옆에 있게 해줘. 로우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떨리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도피는 쉴새없이 읊조렸다. 내가 옆에 있어줄께.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