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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춥다"


"그러게 목도리 두르고 나오라니까"




내꺼 줄께. 아카시가 자기 목에 둘러져있던 목도리를 풀어 후리하타의 목에 감는다. 어, 내꺼 있는데.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던 손짓이 일순간 멈춘다. 목에 목도리가 감겨 온기가 스며들자 다시 손을 움직인다. 그럼 내껀 너가 해. 후리하타의 짙은 감색 목도리가 펄럭인다.




"차가워"


"계속 가방에 있었으니까. 그치만 안두르는 것 보다는 낫잖아"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리하타가 환하게 웃더니 아카시의 목에 목도리를 꼼꼼하게 두른다. 우와, 너 잘 어울린다. 검은 모직자켓 위에 감색이 적당히 보기좋다.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흘긋 바라보았다. 카키색의 야상. 아카시는 얼마전에 스쳐지나가듯이 보았던 인디핑크의 야상이 떠올랐다. 잘 어울릴 것 같다. 멍하게 길을 걷던 아카시의 옷깃을 후리하타가 끌어당긴다. 어디가. 그제서야 아카시가 정신을 차리고 후리하타를 바라본다. 미안.




"세이는 무슨 영화가 보고싶어? 역시 스릴러겠지?"


"로맨스"


"에?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거야?"




아카시의 미간이 좁아진다. 네 연애사업에 도움되라고 그런거잖아. 그의 말에 후리하타의 눈이 커진다. 세이가 날 위해. 감동 받은듯한 표정을 보며 아카시가 한숨을 쉬더니 후리하타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른다. 연애상담 해달라고 불러낸 게 누군데.




"영화표는 내가 살께"


"팝콘은 내가 사라?"




후리하타가 대답없이 씩 웃더니 무인발권기로 다가간다. 세이, 여기 자리 어때? 후리하타의 물음에 아카시는 그의 옆으로 다가간다. 여기해. 여기? 후리하타의 검지 손가락이 좌석 한가운데를 꾹꾹 누른다. 아카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일련의 행동들을 기억에 새기려는듯 유심히 바라본다.




"일곱시 영화다"




아카시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30분. 커피라도 마시자.

근처의 큰 카페에 자리 잡은 두사람은 동년배의 동성친구 치고는 말이 많았다. 카페 구석 창가에 앉은 둘은 이야기하다 창밖을 바라보며 원래의 대화와 다른 주제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대화 주제는 '이노우에 마야'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에 이노우에랑 같은 강의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작년엔 엇갈렸었지"




응. 같이 팀과제 하는 거 꿈꾸고 그랬는데. 아카시는 민망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후리하타를 흘긋 보았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저렇게 행복한건가. 아카시는 샷이 추가된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커피가 내 마음처럼 쓰다. 아니 샷 열잔은 더 추가해야 비슷해지겠다. 아카시는 쓴 맛이 도는 혀 끝을 굴리며 후리하타에게서 시선을 뗐다. 한시간 좀 넘개 대화한 결과, 후리하타는 이번 학기에도 이노우에에게 고백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작년 여름부터 좋아하게 된 그녀는 학과 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여자아이였다. 밝고 얼굴도 예쁘다. 공부도 꽤 하고. 반할만 하지만 왜 반한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후리하타가 반할만만 이유를 모르겠다.




"가자, 시간 다 됐다"




후리하타가 몸을 일으킨다. 뭐해, 가자. 가만히 앉아있는 아카시에게 손이 내밀어진다. 너 스무살 되고서 어리광이 늘었어. 아카시는 그저 웃어보였다. 너가 받아줘서 그래.


영화는 진부했다. 남자는 영화 내내 짝사랑으로 앓다가 결국 여자를 놓쳐버린다. 그리고 영화 끝에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되는 그런 내용. 아카시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오려는 하품을 참느라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역시 로맨스는 아카시의 취향이 아니었다.




"왜 울고 그래"




아카시는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후리하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보지않아도 안다. 실제로든, 마음으로든 울고있겠지. 자신의 사랑도 저렇게 될까봐 조마조마하겠지. 옆을 돌아보자 후리하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실제로 우는군.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고개 들어봐. 아카시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눈물범벅이 된 후리하타의 뺨을 정성스럽게 닦는다. 어렸을 때 안울더니 커서 우는건가? 아카시의 농담에 그제서야 후리하타가 웃는다. 넌 너무 울었어. 아카시도 웃는다. 됐다. 가자, 못난이. 누가 못난이야. 너.








후리하타를 집 까지 바래다주고 아카시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 오래있던 탓에 몸이 얼어 거실의 코타츠에 파고들자 그의 동거인이 비웃음에 가깝게 웃는다. 어지간히 추웠나보군. 은근히 비꼬는 것을 보니 비웃음에 가까운게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거절하지 그랬나. 알면서 놀리지마, 신타로.




"멍청하다는 것이다"


"고백받아서 사귀게 된 녀석에게 그런 얘기 듣고싶지않아"




료타는? 미도리마가 창 밖을 내다본다. 너보다 더 멍청한 녀석이니까. 아카시는 뒷말이 예상이 가 미도리마가 보고있던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또 점괘군. 인의를 다한다는 것이다. 아카시는 혀를 찼다. 어느정도 몸이 녹자 아카시가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던져두었던 지갑과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난 올라간다.


방으로 와 옷을 갈아입고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쥐고 홀드 화면을 푼다. '오늘 땡큐' 그렇게 적혀있는 문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카시와 후리하타는 흔히 소꿉친구라 불리는 사이였다. 유치원 때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옆집으로 이사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였다. 그 누구보다 서로는 서로를 잘 알았다.


'나도 모르는 습관 같은 건 알고 있으면서, 왜...'


아카시는 몸을 뒤척였다. 두사람 다 대학이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서 후리하타네는 도쿄로 이사를 해왔다. 어짜피 후리하타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도쿄에서 혼자 살며 일하고 있었기에 이사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아카시네는 교토 토박이인지라 자취집을 구했다. 처음에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1학년 여름쯤에 도쿄로 올라오면서 연락이 닿은 몇몇 중학교 동창들과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살게 되었다. 쓸 수 있는 방이 4개이니만큼 아카시를 포함 총 네사람이 이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방금의 미도리마, 그리고 지금 집에 없는 키세, 마지막으로




"테츠야"


"오해말아주세요. 노크까지 하고 실례한다고 말까지 했는데 아카시군이 못 들은겁니다"




알았어, 무슨일이야. 아카시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는다. 아카시의 책상의자에 앉아 있던 쿠로코가 몸을 돌려 아카시를 바라본다. 수강신청 내일로 앞당겨진 거 아나싶어서요. 몰랐는데. 그렇겠죠, 아카시군이랑 후리하타군 연락처라 없다고 집에까지 전화가 왔었으니까요. 그래. 코우키한테는 내가 말할께.




"3학년 올라가면서까지 학과에 연락처도 안 알린겁니까"


"아니, 얼마전에 둘 다 핸드폰을 바꿔서 말이야"




아카시가 약올리듯 아이폰을 흔들자 쿠로코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다. 전혀 부럽지 않으니 그만두세요. 싱겁네. 쿠로코가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는다. '아참' 핸드폰의 화면을 두드리던 아카시가 고개를 든다. 2호 밥 떨어졌습니다. 키세 시켜. 개밥은 개가 사는게 좋지. 아카시군이 연락 좀 해주세요. 그 잘난 아이폰으로요. 그러곤 쿠로코가 방을 나간다. 


번거롭게. 아카시는 익숙하게 화면의 숫자버튼을 터치한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간지 얼마되지않아 통화중이라는 안내음이 나온다. 핸드폰을 한번 들여다봤다가 종료버튼을 누른다. 누굴까, 누구와 전화하고 있는걸까. 이노우에일까. 조금 떨리는 손으로 주소록을 뒤적거린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신호가 간지 얼마되지않아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일임까 아카싯치!


"2호 밥 좀 사와"


-엑! 왜 하필이면 저임까?


"개니까. 끊어"




가라앉는 기분에 핸드폰 모서리를 만지작거린다. 지금쯤이면 전화가 끝났을까. 통화목록에 적혀있는 '코우키'라는 글자를 보고 무거운 숨을 내뱉는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문자창을 열어 키패드를 꾹꾹 누른다. '수강신청 내일로 앞당겨졌대' 전송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침대로 던진다.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노트북 키고 의자에 앉는다. 침대 위의 핸드폰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다. 수강신청 같이 맞추고 싶었는데. 노트북의 부팅화면을 봤다가 눈을 감는다. 2년이나 같은 강의 들으면서 따라다녔으면 됐지. 어짜피 세부전공이 다르니까 같은 강의 듣는데는 한계가 있다. 후리하타는 현대소설 전공이었고 아카시는 고전시 전공이었다. 컴퓨터가 켜지자 인터넷을 키고 강의목록이 적힌 사이트에 들어간다. 국어교육학과. 강의목록을 훑어보는데 핸드폰이 알림소리를 내며 진동한다. 급하게 휴대폰의 집어 화면을 본다. '알아, 이노우에가 가르쳐줬어' 그 문자를 보며 아카시는 쓰게 웃었다. 

 내 마음도 좀 알아라.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