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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얼굴에 명백하게 쓰여져있는 그 단어를 보며 후리하타가 웃었다. 개강 때 접촉사고가 났다더니 손목뼈를 다쳐서왔다. 아카시에게 그 날 일의 전말을 들은 후리하타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키세와 위로주를 퍼마시다 취해서 넘어졌는데 땅을 잘 못 짚어 뼈에 금이 갔다는 것. 그러게 수업 빼먹고 술 마시러 가래. 후리하타의 말에 아카시가 잔뜩 인상을 쓴다.




"덕분에 요새 왼쪽 눈 계속 분홍색이네"


"코우키, 네 필기 너무 조잡해"


"화풀이 하지마. 이렇게 복사해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하필이면 다친게 오른손이라 아카시의 짜증은 더 했다. 필기를 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에게 노트를 빌려야했고 꿈에도 없던 강의녹음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금만 간 게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부러졌으면 여름까지 깁스 신세였어.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후리하타가 복사해준 필기를 천천히 읽었다. 중간중간에 정리가 안 된 부분은 왼손으로 겨우 다시 정리해 적었다.




"왼손으로도 그 만큼 쓰는데 왼손으로 필기하면 되잖아"


"글씨의 가독성이 떨어져"


"완벽주의자"




난 완벽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효율성을 따질 뿐이야. 그러다보니 완벽에 가까워진거지. 눈색깔 돌아왔다. 아카시가 핸드폰을 들어 눈동자 색깔을 확인한다. 선명한붉은색이 검은 화면에 반사된다. 넌 정말 이런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구나. 아카시의 칭찬에 후리하타가 웃는다. 아무렴 몇년 친군데.


한참 야외의 테이블에서 필기를 정리하는데 그들의 책 위로 꽃잎이 떨어진다. 고개를 드니 벛꽃나무들이 이제 막 꽃을 피워 바람에 흔들린다. 봄이네. 그러게. 후리하타의 시선이 나무에서 멀리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옆에 짝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애인인듯한 사람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에게 후리하타의 정신이 팔린다.




"부러워?"


"부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냐"




쓸쓸하게 웃는 후리하타를 보다가 아카시는 다시 종이에 시선을 박는다. 저런 얼굴은 날 위해 지어주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욕심에 가슴이 아프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후리하타의 필기에 더 집중한다. 나도 부럽다. 저 사람들도, 너도, 이노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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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교토. 집이다"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있다가 미도리마의 말에 몸을 일으킨다. 거실 구석에 위치한 전화기까지 걸어 가 전화를 넘겨 받는다.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대자 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이쥬로냐.


"네. 무슨 일이세요"


-꽤 못본듯 하구나.


"안그래도 꽃잎 떨어질 쯤에 내려갈까 생각중이에요"


-코우키는?


"일단 권해볼께요"


-알았다. 잘 지내거라.


"네, 아버지도요"




어머니는 중학생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많이 울었었다. 그런 아카시를 달래주었던 것 또한 후리하타였다. 지금의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리하타 덕분에 침착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안 좋은 길로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카시의 아버지는 후리하타를 무척 아꼈다. 아버지는 그의 부모님과도 친했는데 항상 만날 때마다 후리하타가 여자아이였다면 며느리로 삼았을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도 회사의 지분을 조금 떼어 후리하타에게 주고 싶어 하고.



"아카싯치 교토감까?"


"글쎄. 다음주쯤에 가지 않을까"


"그 집 정원 또 보고싶네요. 아름다웠는데"




쿠로코나 키세, 미도리마는 중학교 까지 교토에서 다니다가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다녔었다. 현재 연락이 닿은 아오미네나 무라사키바라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그들은 한번쯤은 아카시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쿠로코가 그 집의 정원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었다.




"같이 갈래?"


"그러고 싶지만 선약이 있습니다"


"아쉽네"




이얏! 시작함다! 키세의 말에 모두의 시건이 티비로 향한다. 취향이 워낙 다른 네사람이라 항상 리모컨으로 싸움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이 시간 만큼은 그런 일이 없었다. 네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때문이었다. 각자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텔레비젼의 화면에 집중한다.




"저는 역시 상디가 좋슴다. 진자 남자잖아여. 멋있슴다"


"그런 변태보다는 루피가 훨씬 멋있는 것 같습니다만"


"변태?!"




나는 로우가 좋다는 것이다. 의사 덕후! 미도리마군 답군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던 세사람의 시선이 아카시에게 몰린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아카시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한다.




"나는 역시"


"로빈! 맞져?"


"쵸파지"




에엑. 아카싯치 캐릭터 이상해졌슴다! 아니, 저 어쩐지 아카시군의 방에서 쵸파 피규어 본 것도 같아요. 아아- 있어, 한정판. 무려 한정판이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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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는 평화로웠다. 나무들도, 사람들도 온통 분홍빛으로 화사했다. 아카시는 무료하게 벤치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서 확실히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 그 때문에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인간관찰이나 하고 있는 거겠지. 멍하게 후리하타와 같은 머리색의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핸드폰 알림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다음 강의 휴강이래' 은근히 겹치는 강의가 많아 같이 다니게 된 하야마의 문자였다. 캠퍼스에 볼 일이 사라진 아카시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 위에 쌓인 꽃잎을 털어내고 집에 가려 발을 떼는데 이번엔 전화가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한다.




"응, 코우키"


-위로주 같이 마셔줘.




물기에 젖은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어디야?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 사범대 건물로 향한다. '나 지금 후문 쪽' 아카시는 고개를 들어 후문의 위치를 확인한다. 기다려 곧 갈께. 전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가방을 고쳐매고 후문을 향해 달린다. 후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터라 조금 뛰니 금방 후문이다. 후문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후리하타를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뛰어간다.




"야.. 너 무슨, 하아- 무슨 일이야?"




숨을 몰아쉬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숙여져있던 고개가 들린다. 후리하타의 붉은 눈가를 보자 아카시가 입술을 꾹 깨문다. 갈색의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가둔다. 울어, 괜찮아. 결국 후리하타는 울음을 터트린다. 우는 후리하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카시는 생각을 정리한다. 분명 이노우에와 관련된 일인텐데. 이노우에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거나 고백했다가 차였거나. 어느쪽이든 후리하타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교토 가자. 교토에 우리집 가자"




이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었지만 아카시는 그저 후리하타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행복한 것만 생각했으면. 그런 아카시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품 속의 후리하타가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시는 조금은 안심하며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는다.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으면. 어쩐지 아카시도 서러워져 코 끝이 시렸다. 더이상 눈물 흘리지 말아, 너가 울면 내 마음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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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센으로 세시간. 교토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미리 대기해있던 운전 기사가 둘을 안내한다. 몇일전까지 울적해있던 후리하타는 아카시의 도움으로 겨우 기운을 차렸다. 후리하타는 봄 기운에 무심코 이노우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 그 날 하루는 탈진할 정도로 울며 술을 마셨던 그였다.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흘긋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있지, 세이는 왜 경영학과로 안 간거야?"


"...왜"


"너 아니면 회사를 이을 사람이 없잖아"




아카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널 따라 국어교육학과로 들어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럼풋이 아카시의 마음을 알고있던 그의 아버지는 아카시가 그 학과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별말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지 말거라'라는 한마디 뿐이었다. 아카시가 대답이 없자 후리하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너가 나한테 말 못할 일도 다 있네. 아카시는 민망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계속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내 차가 멈춘다. 아카시와 같이 창 밖을 보던 후리하타가 웃는다.




"아저씨다"




후리하타가 차에서 내려 집 대문에 서있는 아카시의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잘 지내셨어요? 밝은 후리하타의 목소리에 그의 아버지도, 아카시도 미소 짓는다. 느릿하게 차에서 내린 아카시는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하고 후리하타가 놓고 간 가방을 챙긴다.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두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나무에서 벛꽃잎이 눈 내리듯 떨어진다. 교토에서만이라도 그 여자아이에 대한 건 다 잊고 즐겁기를. 아카시도 벛꽃비가 내리는 집 안으로 들어선다. 따뜻한 햇빛이 아카시가의 정원에 머무른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