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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악하네여"


"그런 조건을 건 것도 수상합니다"




그렇지? 아카시는 탁자에 놓인 책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교토에서 자던 날 밤 이노우에가 후리하타아게 문자를 했었다. 내용은 '고백이 갑작스러워서 진심이 아닌것 같아 거절했다'였다. 그리고 덧붙여진 말은 과관이었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면 사귀겠다' 그 문자를 본 아카시는 화가 나 무시하라고 말했지만 희망 한 줄기를 잡은 후리하타는 이노우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중간고사에서 과내 1등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아카시는 머리 좋으니까 1등 자리 빼앗아버려요"


"그렇게하면 후리하타가 아카시를 원망할 것이다"




키세까지 미도리마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쿠로코가 잔뜩 인상을 쓴다. 대체 후리하타군은 그런 여자가 왜 좋다는겁니까. 책에 고개를 박고있던 아카시가 몸을 일으킨다. 술 잔뜩 마시고 빌빌대고 있는데 이것저것 챙겨줬대. 그런건 아카싯치가 더 많이 했잖슴까! 아카시는 한숨을 쉬고 펜을 집어든다. 곧 시험인지라 거실의 사각 테이블에 네명이 모여서 공부중이었다. 키세는 대본연습. 이번에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얼굴 하나 내비추지 않고 공부중이라는거냐?"


"벌써 2주째 강의 외엔 못 보고 있어"


"후리하타군도 독하군요"




아카시는 전에 복사했던 후리하타의 필기를 집어들었다. 생긴 것 같지않게 똑바른 후리하타의 글씨체를 꼼꼼히 뜯어 본다. 제발 1등 하지마라. 그렇게 생각하며 필기를 내려놓는다. 제발 둘이 사귀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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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른다. 시험에 대한 긴장 따위가 아니었다. 시험은 이미 다 끝났으니까. 아카시는 조교의 손가락 끝을 다시 바라보았다. '원래 보여주면 안되는데 특별히 너니까 보여주는거야' 조교의 말에 아카사기 힘겹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어제 친 과목 점수를 빼고선 후리하타의 성적이 1등이었다. 사무실을 나와 복도에 기대서 마른 세수를 한다. 마지막 시험 못 쳤어라. 아카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후리하타 다음으로 성적이 높았던 건 아카시 자신이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후리하타의 행복을 선택한 그였다. 일부러 몇 문제를 틀렸다. 그러지말껄.




"세이 뭐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거의 한달만에 보는 후리하타의 모습이 보인다. 성적 확인 좀 했어. 성적이라는 말에 후리하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지금까지는 너가 1등이더라. 아카시의 말에도 표정이 좋지않다. 2등은? 나.




"너 어제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넌?"


"난 못 봤어"




아카시는 올라갈 것 같은 입꼬리를 부여잡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역시 난 안되는걸까. 시무룩한 후리하타의 등을 아카시가 부드럽게 토닥인다. 괜찮아, 열심히 노력했잖아. 그리고 생각보다 잘 봤을 수도 있고. 내가 많이 틀릴 수도 있고. 2등이라고해도 너랑 점수차 꽤 났었어.




"그래?"


"응. 아직 성적 안 나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후리하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 안 먹었지? 먹으러 가자. 아카시가 후리하타의 어깨를 잡아끈다. 사범대 건물을 나서던 참에 현관에서 전임교수와 마주친다. 교수에게 인사하고 제 갈 길을 가려는데 교수가 두사람을 붙잡는다. '아카시, 이번에 1등했던데 축하한다. 후리하타군은 마지막 시험 점수가 아쉬웠어' 아카시는 후리하타를 흘긋 봤다가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교수가 가고 난 뒤에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좌절감에 빠진 그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게도 아카시는 기뻤다.


그날 후리하타와 저녁을 먹고 헤어졌을 때까지만 해도 아카시의 기분은 들떠있었다. 곧 후리하타가 그 여자애에 대한 미련을 버리겠지.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에 절대 보지 않는 키세가 모델로 나오는 잡지를 읽었었다. 밤새 들떠있다가 다음날 점심을 같이 먹을 생각으로 후리하타를 찾아 갔을 때 아카시의 기분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노력한 걸 봤으니까 마음이 전해졌대" 


"그래서 ...사귄다고?"


"응"




들고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로 떨어지자 후리하타가 깜짝 놀란다. 왜그래? 그게 그렇게 충격적이야? 핸드폰을 주워주며 묻는 후리하타의 질문은 아카시에게 현실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아카시는 남자고 후리하타의 오래된 친구고 아카시의 마음은 일방향이었고, 그러니까 이어질 수 있었던 고리는 하나도 없었고. 아카시는 핸드폰을 받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딸 시집 보내는 기분이네. 일단 축하해"


"시집이라니. 아무튼 고마워. 다음에 술이라도 사줄께"




점심 먹으러 온 거 아니야? 가자. 아카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괜찮나 얼굴 보러 온거야. 점심 먹을 사람 있지? 난 바로 강의 있어서 가봐야 해. 후리하타는 미간을 찡그렸다. 다음 강의까지 점심 먹을 시간 정도는 있을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노우에와의 점심을 선택한 후리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밥 맛있게 먹어. 아카시는 몸을 돌렸다. 밥 생각이 싹 사라져버려 점심을 거르고 바로 강의실로 향한다. 강의실 문을 열자 전공책을 읽고있는 아오미네가 보인다.




"왠일이냐는 표정 짓지마. F는 질색이라서 공부하는거거든"


"그런 표정 안 지었는데"




아카시가 아오미네의 옆에 쓰러지듯이 앉는다.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아오미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한다. 지금 상태로는 강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마음을 가다듬는다. 숨을 몇번 들이마시고 내뱉어봐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결국 한숨을 쉬고는 눈을 뜬다. 다른 것에 집중할 겸 책을 꺼내들어 펼친다. 오늘 배울 부분을 훑어보는데 아오미네가 아카시의 어깨를 툭 친다.




"너 눈 노란색이다"


"..."


"울 것 같은 표정해가지곤. 울어, 눈 부으면 안경이라도 빌려줄테니까"




가오잡지마, 바보 주제에. 아카시의 웃음 섞인 말에 아오미네가 인상을 쓴다. 뭐라고 받아치려다가 포기하고는 한숨을 쉰다. 몸을 숙여 바닥에 있는 가방에서 수건 한장을 꺼내 아카시에게 내민다. 안 쓴거니까 깨끗해. 아카시가 말없이 수건을 받아들더니 고개를 숙인다.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며 어깨를 떠는 모습을 보며 아오미네가 등을 두드린다. 그 냉정한 아카시가 이만큼 무너져 내린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아오미네는 아무것도 묻지않고 묵묵히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후리 녀석도 완전 바보네. 아오미네는 테이블에 놓인 사과를 집어 먹으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강의 내내 멍하더니 끝나고도 정신을 차릴 줄 몰라 결국 아오미네가 아카시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늦어 저녁까지 먹게 된 아오미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아카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오미네는 놀러거나 당황하기보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들이대는데 모르는게 멍청한거라니까"


"어느 정도였는데요?"




유일하게 아카시와 후리하타, 두사람과 같은 대학을 다니는 아오미네는 재작년과 작년의 아카시의 행동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언제나 같은 강의에, 같이 등교하고, 밥도 같이 먹고 떨어질 날이 없었다고. 같은 사범대이다 보니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붙어있었다는 얘기를 할 쯤 키세는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아카싯치를 울리고! 후리하탓치는 진짜 바봄다!! 됐어, 그만해.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아카시가 대화에 끼어든다. 이리와요 아카싯치! 위로의 허그임다! 팔을 벌리는 키세의 행동에 아카시가 잔뜩 인상을 쓴다. 네 포옹 같은 거 전혀 위로되지 않으니까 그만두도록 해. 너무햇!




"괜찬습니까?"


"어느정도. 오늘 고마웠다, 다이키"


"고마우면 하룻밤만 재워줘. 이 시간에 집에 가기 귀찮아"




그래. 아카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올라간다. 걱정의 시선이 등을 찌르는 것 같아 이를 악 문다. 겨우 방으로 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눕는다. 불거진 방 안에 가로등 빛 조차 들어오지 않아 지독한 어둠만이 깔려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둠에 잡아 먹힐 것 같아 어떻게든 존재를 증명하려 숨을 내뱉는다. 하지만 여전히 눈 앞은 어두웠고 제 손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내가 존재하는 걸까. 후리하타가 없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암흑,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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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로 불쑥 손 하나가 들어온다. 자그마한 손 위에 있는 막대사탕. 고개를 들어올리자 갈색머리의 아이가 말똥말동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진짜 노란색이네' 아카시는 그 말에 손을 들어 왼쪽 눈을 가렸다. 보지마. 아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 어떻게 들어온거야? 여기는 우리집 정원이라서 함부로 못 들어와. 아저씨가 들여 보내주셨는데. 아버지가? 왜? 나 앞집에 이사 왔어! 알았으니까 가. 왜?




"기분 나쁠테니까"


"왜?"


"눈 때문에"




눈? 예쁜데 왜. 보석 같아! 해맑게 웃는 그 모습을 보니 왜인지 모르게 뺨에 열기가 오른다. 바,바보야! 가버려! 부끄러움에 아카시가 아이를 밀자 아이가 힘없이 넘어진다. '아야' 넘어지면서 쓸렸는지 손바닥에서 피가 난다. 피를 보고 놀란 아카시가 아이의 팔을 잡고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피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준다.




"...미안해"


"괜찮아! 그러니까 울지마"




아이가 밴드를 붙이지 않은 손으로 아카시의 뺨을 닦는다. 어? 노란색 눈이 사라졌어. 아카시가 손을 더듬어 왼쪽 눈가를 만지작 거린다. 손 끝에 축축한 물기가 옮는다. 넌 이름이 뭐야? 아카시 세이쥬로.




"세이쥬로는 다정하구나"


"내가?"


"응. 아! 나는 후리하타 코우키야"




코우키. 몇번 입 안에서 코우키라고 웅얼거리다 활짝 웃는다. 반가워, 코우키.


아카시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 맡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을 끄고 몸을 일으킨다. 무슨일인지 처음 후리하타를 만났을 때의 꿈을 꿨다. 어릴적이라 감정조절을 못해 언제나 주변 사람을 괴롭혔던 저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아이였다. 그 '다정'하다는 한마디에 삐뚤어졌던 마음이 누그러졌었다. 그 후로는 유치원에서도 또래들과 잘 지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 코우키에게 빠진걸지도. 아카시는 쓰게 웃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사춘기가 지나고서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쯤에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그 쯤에 그에게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 그런 것 모두 부질없어졌다.




"정리해야지"




기지개를 한번 키고 방을 나간다. 아카시의 책상 위에는 엎어진 액자가 놓여있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