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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식탁에 내동댕이 쳐진다.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노란 눈동자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다시 젓가락을 움직인다. 키세도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밥 먹는데에 집중한다. 쿠로코만이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컵에 따라 아카시에게 건넨다.




"물 좀 드세요"


"고마워"




한자한자 힘주어서 말하는 그의 말에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컵 안의 물을 단숨에 반이나 마신 아카시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눈동자가 겨우 옅은 붉은빛으로 돌아오자 다시 젓가락을 든다. 방금 아카시와 같은 소셜 네트워트 페이지를 본 키세는 혀를 찼다. 간밤에 후리하타가 그의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 찍은 사진을 잔뜩 올렸기 때문이었다. 


요즘 아카시는 불안정했다. 자주 눈동자 색이 바뀌어 컬러렌즈를 끼고 다녔고 같이 있는 사람이 긴장되도록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검은 셔츠에 회색바지의 어두운 색으로 구성된 옷을 입어서 그 분위기가 한층 더 했다.




"잘 먹었어"




몸을 일으키는 아카시를 보면서 세사람은 오늘도 아무탈 없이 넘어가기를 바랐다.








오늘 입은 옷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팔을 접어 올렸다해도 결국 긴팔인 셔츠였다. 더군다나 검정색인지라 열을 자꾸 흡수한다. 늦봄이라해도 날씨는 거의 초여름과 흡사했다. 그늘이 진 벤치에 늘어져있는데 물방울이 맺힌 포카리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난다. 캔을 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웃고있는 이노우에의 눈과 마주한다.




"더워보여서. 받아"




아카시는 캔을 받아들었다. 작년 여름에 그녀는 이런 방법으로 후리하타를 꼬셨을까. 기분이 꺼림칙해 캔을 따기 망설여진다. 포카리 안 좋아해? 이노우에의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캔을 따 입가에 가져다댄다. 그제서야 이노우에가 아카시의 옆자리에 앉는다.




"코우키는?"


"수업. 난 공강"




아예 똑같이 수업을 맞춘건 아니군. 아카시는 차가운 포카리를 한모금 들이 마셨다. 어디서 저를 보고 나타난걸까싶어 주면을 둘러보지만 딱히 있을만한 곳이 없었다. 어디서 보고 온거야? 아카시의 질문에 이노우에가 꽤 멀리 있는 사범대 건물을 가리킨다. 4층 빈 강의실에 있었는데 너가 보여서 따라왔어. 굳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그녀의 말에 아카시가 미간을 찡그린다. 왜? 하지만 더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않아 그 말은 포카리와 함께 삼킨다.




"왜 따라왔냐고 묻지 않네"




묻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입술을 꾹 다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아카시의 반응이 상관없는지 말을 잇는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따라온거야. 너 과에서도 엄청 신비주의고, 코우키가 툭 하면 네 얘기 꺼내거든. 아카시는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강의 있다고 변명하고 가려했더니 불가능 하게 됐다.




"아카시는 꾸미고 다니니까 훨씬 더 멋있네. 반하겠어"




아카시는 이노우에를 바라보았다. 저게 애인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에게 할말인가? 이노우에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실언이지 모르는 듯 얼굴에 여전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멍청한게 아니라면 수상한거다. 아카시가 미간을 찡그리자 이노우에의 표정이 울상이 된다. 혹시 내가 기분 나쁜 말 한거야? 아카시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간 화가 나서 이노우에를 어떻게 할지도 몰랐다. 음료수 고마웠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이노우에가 아카시를 붙잡는다.




"저기... 아카시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겨우 애인의 친구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물어보는 주제에 잔뜩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카시는 혀를 차고 몸을 돌려 이노우에를 마주보았다.




"너 아까부터 오해 살 만한 말이랑 행동만 하는 거 알아?"


"에?"


"애인 있는 주제에 할 말이 아닌 말들을 늘어놓는데 내가 널 좋게 볼 수 있을까?"




이노우에의 얼굴이 붉어진다. 미안. 기어가는 목소리에 아카시가 한숨을 쉰다. 멍청해빠졌군. 아카시는 이노우에의 어깨를 다독이듯 두드렸다. 코우키한테 잘 좀 해줘, 너 많이 좋아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아카시가 몸을 돌린다. 그는 멍청한 여자친구와 사귀고 있는 후리하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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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간만에 술을 마셔서도 있지만 술에 취했던 후리하타 때문이기도 했다. 동기 중 한명이 이민을 간다며 자퇴서를 내 그 송별회로 술자리가 생겼다. 남자하고만 친했던 동기여서 술자리는 전부 남자들 뿐이었고 거기엔 아카시와 후리하타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남자들뿐이었고 들뜬 분위기에 모두들 자신의 주량을 넘겨 마셨고 술이 약한 후리하타는 몸까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었다. 그런 후리하타를 아카시가 데려다주었는데 문제는 후리하타의 술버릇이었다. 그의 술버릇은 어리광이었기 때문이다.




'세이쥬로-'


'왜'


'업어줘'




술이 거의 다 깼던 아카시는 흔쾌히 후리하타를 업었다. 하지만 걸으면서 목덜미에 와닿는 뜨거운 숨결에 몸이 달아올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리하타가 뒷목에 뺨을 부비는 바람에 아카시는 곤욕을 치뤄야했다. 겨우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분명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속에 후리하타의 뜨거운 숨이 떠나질 않는다. 목덜미가 계속 후끈거렸다. 눈을 감아도 후리하타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술에 취해 붉어진 입술에 입을 맞추고 혀를 얽고 싶었다. 살이 붙지 않은 그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나의 것이라는 표식을 남기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더렵혀지지 않았을 그의 뒤쪽을 점령하고 싶었다.

그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벌써 한시간 넘게 뒤척였다. 온몸을 휘감는 흥분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몸을 일으킨다.




"하아..."




잔뜩 달아오른 자신의 것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천천히 느릿하게 시작했다가 후리하타를 범하는 상상을 하면서 박자가 더욱 더 빨라진다. 뜨거운 그의 내부에 이걸 밀어넣는다면. 진득하게 달뜬 숨을 내뱉으면서 그가 날 올려다본다면. 그 빨간 혀를 움직여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아카시는 손바닥에 쏟아지는 끈적한 액체를 느끼며 희열과 자괴감을 동시에 맛본다. 단 한번도 후리하타에게 욕정을 가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행위의 소재로 쓴 적은 없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코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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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봄기운은 온데간데 없고 푸른 잎들이 돋아난 캠퍼스는 청량감 마저 감돌았다. 몇몇 사람들은 벌써부터 방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더위에 절어 부채질을 하는 하야마를 바라보았다. 하야마는 더위에 몸부림 치면서도 여름방학 계획을 짜고 있었다. 같이 동거하는 사람이랑 바닷가에 놀러가겠다나 뭐라나. 아카시는 우연히 만난 성격 나쁜 그의 동거인을 떠올렸다.




"너 용케도 그 사람이랑 잘 지낸다"


"응? 미야지씨 착해. 내 타입이야"




내 타입? 아카시의 표정을 읽은 하야마가 놀란다. 또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군. 아카시가 묘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 사람 좋아하지? 뭐? 아니! 아, 아니아니. 아닌건 아닌데 좋아하는데. 붉어지는 얼굴에 아카시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거 편견없으니까 말해도 돼. 그제서야 하야마의 얼굴이 밝아진다. 사귀어! 단도직입적인 말에 아카시의 웃음기가 사라진다.




"어떻게 사귀게 된거야?"


"응? 그냥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쫓아다녔어. 농구대회에서 보고 뿅! 갔지"




그렇게 졸졸 쫓아다니다가 급기야 미야지와 같은 대학에 까지 쫓아와 결국 1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다는 얘기까지 들은 아카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좋아한다고 끈질게 들러붙었다면 가능했을까. 동정이나 연민으로라도 나랑 사귀어 주었을까. 하지만 금방 생각을 멈춘다. 그런 감정은 원하지 않았고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현재에는 더이상 아카시가 끼어들 자리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아카시 농구 좋아해?"


"좋아한다기보다는, 좀 했었지"


"그럼 내일 농구하자"




하야마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그 미야지씨랑? 하야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시는 고민하는듯 하다가 주말에 집에 있어봤자 잡념만 가득할 거 같아서 하야마의 제안을 수락한다. 아카시는 핸드폰을 꺼내 일정을 저장한다. 후리하타에게서 문자 한통이 와있었지만 읽고 답장하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답장이 없으면 초조해하며 자신을 생각할까봐. 내용 또한 답장하기 싫어지는 얘기였다. '주말에 시간 있어? 다 같이 놀자' 저기의 '다'라는 말은 아카시와 후리하타, 이노우에 이렇게 세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다'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사이였던가. 멍청한 두사람은 혼자 남은 아카시가 걱정되어 권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아카시는 혀를 찼다.




"멍청이 둘이서 연애할 맛이 나나"


"엑? 나랑 미야지씨?"


"아니"




바보같은 표정을 짓는 하야마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의실 가서 미리 에어컨 틀어놓자, 덥다. 그의 말에 하야마도 몸을 일으켜 아카시를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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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턱 끝에 맺힌 땀을 훔쳤다.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어. 늦은 아침에 만나서 지금까지 쉬지않고 농구를 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계속 되는 농구에 아카시는 온 몸이 욱씬거렸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네경기를 뛴거나 다름 없었다. 불이 붙은 하야마와 미야지를 제외한 나머지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지친 표정이었다. 결국 아카시가 총대를 맨다.




"하야마,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그제서야 두사람이 시간을 확인하고선 농구공을 내려놓는다. 농구공을 내려놓자마자 타카오가 농구코드에 드러눕는다. 으아아! 미야지선배는 너무 열심이에요! 아카시도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알고보니 이 농구경기는 하야마와 미야지의 내기 중 하나였다. 내기 규칙을 왜인지는 몰라도 3on3로 정해서 미야지는 고등학교 후배인 미도리마와 타카오를, 하야마는 아카시와 중학교 동창인 키요시를 불렀다. 서로 무엇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것인지 두사람은 치열했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막상막하인 실력에 경기는 무승부였다.




"끝난거라면 나는 이만 가야겠어. 오후에 또 약속이 있거든"




그렇게 키요시가 자리를 뜨고 남은 다섯사람은 늘어져 휴식을 취했다. 하야마와 미야지는 승부가 나지 않은 내기에 대해, 미도리마와 타카오는 점심을 먹을 가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카시는 문득 어제 받은 후리하타의 문자가 떠올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이후로 후리하타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아무런 알림도 없이 어제와 같은 화면의 핸드폰을 보며 쓰게 웃는다.


'이제 내가 신경쓰이지도 않나보네'


아카시는 드문드문 구름이 떠있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눈을 꾹 감는다. 그러고보니 코우키의 코우는 빛이었지. 감은 눈을 떠 해를 바라보지만 따가운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코우키, 빛.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