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시는 얼음이 띄어진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저었다. 무료함을 감출 길이 없어 턱을 괸채로 옆자리의 두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둔다. 왜 두사람의 데이트에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끼워 넣으려 하는지.  아카시는 두사람의 뇌를 해부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공감능력에 문제가 생긴걸까. 이노우에의 멍청함이 후리하타에게도 옮은 것 같아 기분이 좋지않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한참 대화하고 있던 두사람이 아카시를 바라보지도 않은채 그의 말에 대답한다. 아카시는 후리하타 모르게 렌즈통을 챙긴다. 화장실로 들어와 거울을 확인하니 역시나 눈동자 색깔이 거의 노란색으로 바뀌어있다. 다시 감정조절이 되는가 싶더니 두사람 때문에 되지않는다. 아카시는 익숙하게 렌즈를 꺼내 눈 안에 넣는다.렌즈가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통을 주머니에 넣는데 화장실 문이 열린다.




"세이 울어?"




후리하타가 눈가가 붉은 아카시를 보더니 다가온다. 뺨에 살짝 어린 물기에 걱정이 담긴 표정을 짓는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씻은거야. 뭐야 그런거였어? 후리하타는 안심하더니 세면대에 손을 씻는다. 아카시는 그런 후리하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 볼 뿐이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어색하다. 근 몇달만에 확연하게 벌어진 거리에 아카시의 기분은 가라앉는다. 후리하타가 손을 다 씻자 아카시가 손수건을 건넨다. 고마워. 손을 닦고 손수건을 다시 개어서 아카시에게 준다. 아카시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매우 낯설었다. 왜인지 몰라도 자신이 알던 후리하타가 아닌 것 같아 서러워졌다.


화장실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않아 데이트는 끝이 났다. 후리하타는 이노우에를 바래다 주고 싶어 했지만 이노우에는 거절했다. 남자친구의 배웅을 진심으로 거절하는 모습은 사귄지 100일도 안 된 연인에게는 좀 보기 드문 모습이었지만 이노에의 집은 전철을 타고 가야했기에 어찌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전철역까지 이노우에를 배웅하고 두사람은 오랜만에 걸었다. 아카시가 계속 말이 없자 후리하타가 무언가를 말해보려 우물쭈물거린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후리하타와 아카시에겐 원만한 대화를 할만한 주제가 없었다. 강의도 따로 듣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가 갈라지면서 둘의 대화주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후리하타는 그 사실을 깨닫자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과 아카시의 사이가 변함없을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후리하타는 나란히 걸어가는 아카시의 옆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이 불편한 침묵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한 무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건 여전하네. 후리하타는 아카시가 들으면 코웃음 칠 생각을 하며 조금 슬픈표정을 지었다.




"뭘 울상이야. 방금까지 봤는데 또 보고싶어?"


"응? 아니야. 너 생각중이었어"


"징그럽게 내 생각은 왜 해"




후리하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징그럽게' 평소의 아카시였다면 이런식의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무심하긴해도 지킬건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후리하타는 고개를 살짝 빼 아카시의 왼쪽 눈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빛에 후리하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 사이가 이만큼 멀었던가. 아카시에 대한 건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만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 빗나가자 혼란스럽다. 혹시 세이쥬로가 변한걸까. 후리하타는 얼른 그 생각을 지워버린다. 변했다면, 누군가 변한거라면 그건 아카시가 아니라 후리하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검은 털이 뒤덮힌 꼬리가 살랑거린다.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자 꼬리가 움찔거리더니 다시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커다란 앞발이 몸을 덮치자 힘에 밀려 그대로 잔디밭에 내동댕이 쳐진다. 부드러운 잔디가 등에 닿는다. 가슴께의 무게감을 느끼며 작게 웃는다. 날 너무 좋아하는데, 테츠야.




"왜 걔가 테츠야야?"




머리맡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카시가 시선을 옮긴다. 담벼락에 팔을 걸친 후리하타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번 주말은 데이트 안 갔네. 아카시는 매번 주말마다 둘의 데이트에 끌려나갔던 걸 떠올렸다. 오늘은 이노우에 과제도 있고 나도 너랑 있고싶어서 쉬기로 했어. 아카시는 2호를 옆으로 밀고는 몸을 일으킨다. 별로 이렇게 시간내줘도 기쁘지않은데. 하지만 그 생각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다. 잔뜩 삐뚤어진 마음을 후리하타에게 화풀이 할 수는 없었다. 들어와. 대문을 열어주고 아카시가 집안으로 들어간다. 후리하타가 마당으로 들어오니 2호가 짖는다. 유독 여자냄새를 싫어하는 2호가 후리하타를 보며 짖는 걸보면 후리하타에게 이노우에의 냄새가 배인 게 틀림없다.




"테츠야가 주운 개야. 자세히 보면 둘이 닮아서 이름이 쿠로코 테츠야 2호야"


"우와 이름 센스없네"




아카시가 턱짓으로 거실의 테이블을 가리킨다. 앉아있어. 씻고올께. 후리하타가 거실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 아카시는 욕실로 들어간다. 욕실의 샤워기를 틀었을 때야 자신이 여분의 옷을 안 가져온 걸 깨닫는다. 2층까지 수건 두리고 가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적신다.


샤워를 끝내고 허리에 수건만 두른채로 나오는데 계단 앞에서 후리하타와 마주친다. 아카시는 당황했지만 겨우 무표정을 유지하고 후리하타를 지나친다. 잠간 마주쳤던 후리하타의 눈 또한 당황으로 물들어 있어서 이를 악 문다. 어렸을 때부터 볼 거 못볼 거 다 본 사이인 주제에 그런 표정은 또 뭐야.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가자 어느새 거실에는 이 집 사람들이 모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후리하타군이 이 집이 처음이라는 게 놀랍네요"


"작년까지는 다른 곳에서 꽤 자주 만났으니까 당연히 이 집에도 온 줄 알았다는 것이다"


"후리하탓치의 여자친구는 저 모름까? 사인정도는 해줄 수 있슴다"




닥쳐. 아카시가 키세의 등을 발로 차자 키세가 테이블에 엎어진다. 너무햇! 키세의 모습을 보고 후리하타가 웃는다. 우와, 중학교 때 생각난다. 아카시가 후리하타 옆에 앉자 어느새 네사람은 중학교 때 추억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카시는 별 다른 얘기없이 옆에 있는 후리하타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혹 반팔을 입은 후리하타의 팔과 나시를 입은 아카시의 팔이 스치는 것 외에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러보고니 나 아까 엄청 놀랐는데, 세이는 언제 그렇게 몸이 좋아진거야?"


"응?"


"중학교 이후에는 거의 벗은 거 못 봤으니까. 아까 몸에 근육 붙어있는 거 보고 엄청 당황했다고. 세이랑 쿠로코랑 나는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근육이 좀 생겼습니다만"




푸하핫! 어딜봐서여 쿠로콧- 컥. 너는 맞을 짓을 한다는 것이다. 아카시는 중학교 3학년 이후를 떠올렸다. 분명 죽학교 때 까지는 후리하타와 아카시의 몸은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운동을 했었다. 힘을 빼지않는다면 어느순간에 미쳐서 후리하타에게 손을 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운동은 거의 집에 와서 했기에 후리하타는 모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체계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아마 후리하타가 본 근육들은 최근에 자리를 잡은 것이겠지.




"아카싯치 스포츠센터 다니니까요"


"진짜? 언제부터?"


"4월말부터. 료타가 추천해줘서 다니고 있어"




이번 운동은 화를 억누르기 위해서 시작했다. 왼쪽눈의 색이 붉은색으로 바뀔 줄을 모를 때 키세가 운동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수락했었고. 후리하타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아카시의 팔을 꾹꾹 누른다. 나도 운동해야하나. 후리하타의 작은 목소리에 아카시가 웃는다. 연애한다고 운동할 시간 없을텐데. 미도리마가 흘긋 아카시를 본다.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시선을 거두는 걸 보니 태연하게 잘 말했나보다.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슴까. 방학되면 우리 워터파크 가요! 싫습니다. 싫다는 것이다. 매몰찬 반응에 키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괜찮네. 남자 둘이 가면 꼴불견이긴 할텐데, 가볼만 해"


"역시 아카싯치는 뭘 좀 압니다! 걱정마세여, 제가 죽여주는 헌팅스킬 전수해드리겠슴다"




아카시군 설마 여름을 노리고 운동 시작한겁니까. 아카시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한다. 하지만 모델이랑 가면 귀찮다는 것이다. 상관없어, 헌팅스킬만 받고 버리면 되잖아. 잔인햇! 다시 자신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온 아카시를 보며 후리하타가 웃는다. 무심하면서도 따뜻한 아카시. 한참 헌팅에 대한 얘기로 열을 올리는 키세를 즐거운듯 바라보는 아카시는 자신이 십년 넘게 알아온 그 아카시였다. 그제서야 불안하던 마음이 안심이 되어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다. 

다행이야, 세이.








#


책상 위에 거칠게 놓아지는 가방을 보곤 하야마가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약을 꺼낸다. 물 필요해? 응. 가방을 뒤적거려 생수를 꺼내 약과 함께 건넨다. 아카시는 약을 받아 단숨에 목 뒤로 넘긴다. 요즘 아카시는 소화장애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후리하타네 커플이 하루 중 한끼는 아카시와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처음 일주일동안은 계속 체해 호되게 고생한 아카시였다. 거절을 해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탓에 무용지물이었다. 


아카시가 진지하게 후리하타를 붙잡고 이유를 물었을 때 후리하타는 아주 해맑은 얼굴로 답했다. '그야 네가 많이 걱정되니까' 거기다 덧붙인 한마디는 아카시에게 엄청난 고비였다. '이노우에가 알아봐주고 먼저 권한거야.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도대체 무엇을 알아본걸까? 후리하타가 자신을 걱정하는 걸? 그렇다고해서 이렇게 끈질기게 함께 식사하게 하는 건 무슨 논리인가. 하루에 한번씩 밥 먹으면 후리하타의 걱정이 사라지나? 그걸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후리하타는 또 무슨 정신인가. 아카시는 눈동자 색이 변할 것 같았다. 찢어 죽이고 싶다. 그 이노우에를.




"으악! 뭐야, 너 눈동자 색깔 이상해졌어!"




역시. 아카시는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눈을 감았다. 모든 생각을 그만두고 숨을 고르는데에만 집중한다. 평소보다 오래걸리긴 했지만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눈을 뜨고 눈 색깔을 확인한다. 엷은 분홍색. 렌즈를 껴야겠다.




"너 눈 그거 뭐야?"


"그냥 감정이 격해지면 눈동자 색깔이 변해"




너만 알고있어. 하야마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야마에게 이정도쯤은 알려줘도 되겠지. 아카시는 가방에서 렌즈통을 꺼냈다. 들키지 않으려고 써클렌즈 끼는구나. 응. 이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렌즈를 끼운다. 옆에서 유심히 보던 하야마가 아카시의 눈동자를 자세히 관찰한다. 감쪽같네. 다른 눈동자랑 톤 맞게 특별제작 한거니까. 우와 부잣집 도련님. 렌즈통을 정리한 아카시가 의자에 등을 기댄다. 시계를 확인하니 다음 강의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언제부터 그런거야?"


"몰라.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더이상 묻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자 하야마가 입을 다문다. 하야마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의 아카시가 흥미로웠다. 눈동자 색이 바뀌면 분위기도 달라지네. 여기서 더 건들여보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만큼의 사실을 알려준 신뢰를 생각해서 관둔다.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어느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워지자 아카시가 입을 연다.




"둘 사이에 날 끼우는 이유가 뭘까"


"응? 뭐가?"


"코우키랑 이노우에"




아아. 하야마가 눈동자를 굴린다. 아카시는 여러 선택지들을 떠올리지만 전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이렇게 괴롭히는건가. 아니면 이노우에가 코우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 포기하게 만들기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는건가. 아카시는 소름끼치게 웃는 이노우에가 상상 되어 몸을 떨었다. 일순간 이노우에가 마귀할멈처럼 느껴졌다.




"너가 비밀 알려줬으니까, 나도 알려줄께"


"뭐?"


"이노우에는 후리하타를 좋아하지 않아. 써먹을데가 있어서 사귈뿐이지"




후리하타는 마녀의 함정에 빠져있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