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버스 주의





*

"모자?"
"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주신 거랑 비슷해서. 동네 강아지가 물어가는 바람에 하루만에 잃어버렸지만"

로우가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온천섬을 돌아다니다 발걸음까지 멈추고 쳐다보는게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아 생일선물로 사준 모자였다. 생일이 지난 한참 뒤에 물어본것도 우습긴 하지만 문득 그 모자를 고른 이유가 궁금했었다. 괜히 모자에 대해서 물어본건가. 언젠가 들었던 그의 부모 이야기. 분명 그 때도 아닌척했지만 표정이 좋지않았었다. 도피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로우를 바라보았다. 원체 잘 안먹는 로우라 식사량이 적어서 그런지 그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떠먹고있었다. 도피는 화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그 꼬마곰은?"
"자"

베포의 하루일과는 오전 내도록 뛰어다니며 성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해질녘쯤 잠에 드는 것이었다. 처음에 도피는 로우 몰래 베포를 없앨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익숙해져버렸다. -로우의 훈육으로 말썽을 덜 부리게 된 것도 있다- 이제 없으면 허전할정도. 그러고보니 도피. 로우의 부름에 도피가 생각에서 빠져나온다.

"요즘 많이 바쁜가보지?"
"좀. 연말이니까"
"잠은 자는건가?"

로우의 속 보이는 질문에 도피가 웃었다. 물론. 내 방에도 침대는 있어. 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좀 골려줄까. 도피가 턱을 괴고 로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로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도피를 바라본다. 왜?

"내 품이 그립다면 내 방으로 와서 자도 돼"

로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티스푼을 내려놓는다. 먼저 일어나지. 도피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로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큰소리를 내며 웃는다. 귀여운 꼬마.




*

침대에서 뒤척이길 몇번째, 겨우 잠에 들면 얼마 안 있어 깨길 몇번째, 결국 로우는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가 드레스로사의 겨울은 왜 이렇게 추운지. 난로를 틀어도 방이 커서 난방이 잘 되지 않는다. 주인집에서는 이렇게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로우가 침대를 빠져나온다. 베포라도 껴안고 잘까하다 관둔다. 자는 녀석을 들어올렸다가 제대로 할퀴어진 적이 있기 때문에. 결국 로우는 발을 옮긴다.




*

도피는 한참 서류를 뒤적이며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로우에게 국정을 맡기며 놀러다니느라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제대로 파악못한것도 있고, 칠무해 일까지 겹치면서 -이건 로우에게 맡길 수 없기에- 일이 많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당장 로우를 깨워서 일을 시키고 싶었다. 문제는 자기가 있을 땐 로우는 절대로 국정일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한숨을 쉬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방문이 열린다. 이 늦은 시간에 베르고일리도 없는데. 고개를 들어올리자 로우가 보인다.

"꼬맹이 무슨 일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우가 도피의 무릎에 올라탄다. 허리를 껴안더니 강아지처럼 몸을 부빈다. 아 따뜻해. 잠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차가운 몸에 도피는 한기를 느꼈다. 난로 안 틀고 자는가보지? 트는데 추워. 가만가만 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도피는 고민했다. 이대로 일을 할 것인가, 로우랑 잘 것인가. 도피의 고민을 알아차린건지 로우가 입을 연다.

"내일 내가 일 도와줄께, 자자"

도피가 웃는다. 귀여운짓도 가지각색이군. 로우의 머리카락에 뽀뽀를 해주곤 그를 들어올려 침대에 눕힌다. 서류를 정리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차가운 몸을 껴안자 품을 파고든다.

"방이 추우면 여기와서 자도록 해"

품에 안긴 머리가 작게 움직인다.




*

어느새 1월이었다. 로우는 동료들의 신년선물을 사야한다는 모네에게 끌려 시가지에 나온 상황이었다. 추워죽겠는데 쇼핑은 무슨. 그런 투덜거림은 싹 무시한 모네는 열심히 가게를 돌아다녔다. 도피가 생일선물로 사준 모자에 검은 털이 북슬북슬 달린 옷에 코트까지 입은 로우는 얇게 입고 있는 모네를 멍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설녀라서 그런지 추위를 안타나보군. 멍하게 있는 로우에게 모네가 선심쓰듯 다가온다.

"로우도 도련님 선물을 사는게 어때요"
"좋아할까"
"그럼요. 도련님이 로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날개를 퍼덕여 가게들 사이로 날아간다. 도피가 자신을 좋아한다니. 단순히 파트너로써의 호감이겠지 싶어 넘기려다가도 크게 뛰는 심장이 거슬린다. 모네! 도피가 날 좋아한다고? 로우의 부름에 모네가 다시 다가온다. 그냥 파트너, 동료로써 그렇게 좋아하는 거 말하는거지? 로우의 말에 모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전혀요. 저희랑은 아주 다른 눈빛으로 보는데요. 눈에 하트가 달려있어요"
"그럴리가"
"도련님도 사랑이라는 게 어색해서 모르시는거에요. 누가봐도 사랑인데"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멍해진다. 도피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좋아하게 된건가.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모네가 구경하고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를 둘러보던 로우는 핑크색 털 자켓에 시선이 멈췄다. 모네 또한 로우의 곁으로 와 그 옷을 바라보았다.

"엄청 특이하네요. 입으면 분홍색 새같이 보이겠다"

로우는 가게의 카운터로 다가갔다. 저거 가장 큰 사이즈로 줘.




*

"벌써 19살인가?"
"꼬맹이는 빨리 크는 법이지"

얼마전 해군에 들어간 베르고는 사정상 성에 돌아올수가 없었다. 아쉬운대로 전보벌레로 베르고의 보고를 듣던 도피는 짧게 로우의 안부를 전했다. 1년만 더 있으면 바다에 나갈 수 있겠군. 그렇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몇번 오간 후에 전화를 끊었다.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노크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시종 하나가 크기가 큰 상자 하나를 가져와 도피의 앞에 둔다. 이게뭐지? 도피의 물음에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답한다. 왕비님이 드리는 신년선물입니다. 로우가? 예. 나가봐. 시종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간다. 상자를 열어보자 핑크색 털 투성이다. 정체를 알수없는 털뭉치를 들어올리자 옷의 형태가 드러난다. 옷 사이에 있다 테이블로 떨어진 카드에는 'Dear. 플라밍고'라고 적혀있다.

"홍학..., 내가 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군"

도피는 기분좋게 웃으며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얼마되지 않아 시종 하나가 방으로 들어온다.

"대신들을 소집해. 정기회의 해야지?"




*

"올해는 빨리 소집하셨군요"
"기분이 좋거든"

항상 정기회의를 귀찮아해 미루던 도피에게 이번 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한해의 처음인 1월에 정기회의를 시작한 것은 도피의 집정 이후로 처음이었다. 대신들도 만족스러운듯 기분 좋은 모양새였다. 정기회의의 의례적인 과정을 끝내자 도피가 몸을 나른하게 쭉 핀다.

"로우가 신년선물로 옷을 주더군. 다음에 한번 입고 오지"
"그거 때문에 기분이 좋으십니까?"
"응. 내가 사람은 잘 고른 것 같더군"

도피가 기분 좋은듯이 미소지었다. 그러나 대신 중 몇명은 로우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그래서 말인데 왕비가 속해있던 집안에 직위를 내려야 합니다. 지금 오래도록 미루셨습니다"
"도련님, 후계자는 어찌되셨는지요"
"왕비님께 너무 관대하신 건 아니신지요"

도피의 표정이 구겨진다. 하나씩 질문해.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곤 다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한다. 직위를 내려야합니다. 혈연이 아니니 가장 낮은 귀족계급으로. 후계자 계획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노력중이야. 너무 왕비님을 풀어두시는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왕비님이 가장 최근에 한 히트사이클이 언제인지요?"
"..."
"얼마전에 성 안에서 호르몬약이 발견되었습니다. 성 안의 오메가는 왕비님이 유일할텐데요"
"회의는 이만하지"

도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로우 그건 뭐야?"
"초콜렛이라는거야"
"먹는거?"
"응. 넌 먹으면 안돼. 동물 몸에는 좋지 않아"

로우의 말에 베포의 표정이 울상이 된다. 두달새에 몸짓이 훌쩍 커졌다. 이제 10대 소년의 덩치였다. 로우가 초콜렛을 집어 입안에 넣는다. 어제까지만해도 티타임 디저트로 스콘이 들어오더니 오늘 초콜렛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티타임 디저트를 거르다 한번 먹었던게 생각보다 맛있어 몇달전부터 꾸준히 먹고있었다. 역시 이 초콜렛 또한 맛이 뛰어났다. 홍차를 마시면서 소파에 기대 나른하게 책을 읽었다. 엎드려 책을 보던 베포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다.

"로우 이상해"
"왜?"
"발자국 소리"

베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린다. 시종 둘이 로우에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수갑을 채운다. 당황한 로우는 반항이라도 하려했지만 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능력도 써지지 않는걸 보니 해루석 수갑인게 분명했다. 결국 로우는 시종들에게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왕의 알현실이었다. 도피의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어 앉혀졌다.

"도피! 이게 무슨..."

고개를 들고 바라본 도피의 표정은 한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