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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




코우키랑 관련된 일이야? 아니면 나한테 개인적인 볼 일? 묘하게 들떠있는 그녀를 보며 아카시는 갖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손을 들어 왼쪽 눈가를 만지작거린다. 눈동자의 색깔이 돌아오지 않아 아침부터 렌즈를 껴야했다. 기분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노우에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아직 확인해봐야 할 것이 많아 참는다.




"이노우에. 너 코우키 좋아해?"


"갑자기 그건 왜?"




대답 대신 되물어오는 질문에 아카시가 인상을 쓴다. 점점 신빙성을 가지는 하야마의 말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씁쓸하다. 그동안 바쳤던 후리하타의 정성이 아까웠다. 그리고 갈 곳 잃은 그의 마음 또한 가련했다. 아카시는 얼음이 띄워진 물잔을 들이켰다. 목이 탔다. 코우키한테 무슨 일 있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코우키라는 이름에 화가 난다. 넌 그 이름 부를 자격따위 없어.




"숨길 생각 하지마. 코우키 안 좋아하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


"뭘 얻어먹으려고 코우키랑 사귀는거야?"




엷게 미소짓고 있던 이노우에가 인상을 쓴다. 끝까지 발뺌할 셈인가. 아카시가 이노우에의 눈을 바라본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하는 눈빛에 구역질이 인다. 이노누에는 내가 자길 싫어하는 걸 알까. 좀 더 그려를 몰아붙이기 위해 입을 여는데 그녀가 먼저 목소리를 낸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네"


"..뭐?"


"근데 이건 못 알아냈나봐. 나 너 때문에 코우키 고백 받아들인건데"




아카시의 눈이 커진다. 놀란 아카시의 표정을 보며 이노우에가 웃는다. 난 코우키가 아니라 너가 좋아. 근데 넌 항상 코우키만 바라보잖아. 코우키의 옆에 있으면 너가 날 봐줄까해서 사귀었던거야. 그리고 진짜 너가 날 봐주더라. 아카시가 이마를 짚는다.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아카시는 그대로 자릴 박차고 나가버린다. 이노우에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 볼 뿐이었다. 이제야 날 제대로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이노우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마야! 어디야?


"나 잠깐 밖에"


-그래? 강의실에 미리 가 있을께.


"있지 코우키"


-왜?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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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덥지근한 여름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간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얼마나 집으로 갈지 말지 고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멘션의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곽에는 대가리가 타버린 꽁초만이 그득했다. 담배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기 시작했었다. 이유는 역시나 후리하타였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마음을 억제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운동, 담배, 섹스. 담배는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끊었다. 후리하타의 '몸에도 안 좋은거 끝으면 안되나?'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카시는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웃음이 나왔다. 후리하타에게 목을 매달았던, 매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아카시는 왼쪽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색깔이 바뀌진 않았을까. 만약을 위해 렌즈를 꺼내려는데 시야에 신발 한쌍이 들어온다.




"세이쥬로?"




고개를 든다. 조금, 아니 매우 당황한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런 눈을 하고 있음에도 손을 내밀어 아카시를 일으켜준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옷을 턴다.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신발 밑창에 지져 불을 끄고 꽁초가 가득한 담배곽에 넣는다.




"좀 걸을래?"




후리하타가 턱으로 공원 방향을 가리킨다.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든 앞장 서 걷는다. 담배 다시 피네. 오늘만 피는거야. 왜? 아카시가 입술을 꾹 깨문다. 멘션 앞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수십번도 했던 고민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말할까, 말까. 후리하타는 대답하지 않은 아카시를 추중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말없이 노을이 지른 여름 하늘 아래를 걸었다.




"넌 옛날부터 고민이 있으면 속에 담아두잖아"




공원을 걷던 아카시가 뒤를 돌아 후리하타를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두사람의 걸음이 멈춘다.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가끔은 밖으로 털어놔도 괜찮아"


"코우키"


"응?"




아카시가 괴로운듯 인상을 쓴다. 끈적한 습기를 지닌 공기가 두사람을 감돈다. 아카시는 주먹 쥔 손이 찝찝하다고 느꼈다. 습기 때문인지 손에 땀이 찬 탓인지 알수없었다. 등 뒤에 땀도 그러했다. 후리하타는 침착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카시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가 이내 결심한듯 입을 연다.




"이노우에는 널 좋아하지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목적으로 너의 고백을 받아들인거라고"




후리하타가 허탈하게 웃는다. 


농담 하지마. 그럴리가 없잖아.

무슨 근거로?

너야말로 무슨 근거로?

본인에게 직접 묻고 들었어.


후리하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거짓말 하지마!" 




아카시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알고있다. 후리하타가 자신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있는 걸. 오래 지내온만큼 아카시가 진실을 말한다는 걸 후리하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한다.




"너... 마야 좋아하지? 그래서 이간질 하려고 그러는거지?"


"아니야"


"그럼 걔가 무슨 목적으로 나랑 사귀는건데?"




아카시는 이를 악 물었다. 여기서 솔직히 말한다면,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봐봐, 지어낸 말이잖아' 지어낸 말이 아니야. '그럼 목적이 뭔데? 말해보라고'




"내가 목적이래"


"너?"


"내 눈에 들기 위해서 너랑 사귄다고 했어"




그럼 마야는 널 좋아하는거야?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리하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좌절로 뒤덮인다. '그럼 넌 마야랑 사귈거야?' 아니. '왜?' 안좋아하니까.




"그럼"




후리하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됐어"


"...됐다니?"


"난 마야가 좋아. 옆에 있는 것 만으로 만족해. 적어도 계속 연인인 척은 해주니까 그걸로 됐어"




아카시가 망연하게 후리하타를 바라본다.


그걸로 됐다니. 그 아인 널 사랑해주지 않는데 널 이용할뿐인데 왜 굳이 옆에 있겠다는거야? 내가 있잖아, 나한테 오면 되잖아. 왜 굳이 그 년 옆에 있으려는거야 왜? 내가 싫어? 내가 모자라? 내가 부끄러워? 왜? 도대체




"내가 그 여자애한테 뒤쳐지는 게 뭔데!!!"




'내가 남자라서? 무슨 이유로 날 바라봐주지 않는거야?!!' 후리하타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지르는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이, 너 지금 무슨 말을...' 당혹감에 후리하타가 임을 벙긋거린다. 아카시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친다. 도망가지 못하게 뒷덜미를 잡고 입 안 깊숙히 침범해 혀를 얽는다. 수년간 바래왔던 그 행위는 눈물이 뒤섞여 짠맛이 났다. 후리하타는 충격 때문인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아카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숨이 차오를 쯤 아카시의 입술이 떨어진다.




"좋아해 코우키, 좋아해... 아니 사랑해.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어"




서글프게 말하는 아카시를 후리하타는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의 눈물 어린 고백이 후리하타의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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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만난 아카시는 평소와 다를게 없었다. 이노우에와 후리하타는 여전히 연인관계였고,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십년지기 친구였다. 오후에 있는 강의에서도 그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코우키는 몇번이야?"


"나 4번"


"나도!"




팀 과제가 있어 뽑기로 팀을 정하는데 두사람이 같은 팀이 됐는지 저들끼리 속삭이며 웃는다. 아카시는 옆에 앉아있는 하야마의 쪽지를 흘긋 보았다. 12번. 그리고 자신의 쪽지를 확인했다. 4번. 하야마와 바꿀가싶어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응? 왜?




"아카시도 4번이네! 우리 셋이 같은 팀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싱거운 아카시의 반응에 하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관심을 끈다. 아카시는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쉰다. 고개를 돌려 이노우에와 후리하타를 바라보니 절로 인상이 써진다. 싱글벙글 웃으며 즐거워하는 이노우에와 당황스러워하는 후리하타. 마녀같은 년. 결국 세사람은 같은 팀이 되었고 교수가 마련해 준 회의시간 때문에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했다.




"아카시가, 시전공?"


"고전시"


"그럼 시로 할까"




둘 다 현대소설 전공이면서. 후리하타는 이노우에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로 정한 후에 이노우에가 교수가 나워준 시 목록을 훑는다. 이노우에가 시를 읽는데에 시간이 걸리자 후리하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 다녀올께' 후리하타가 강의실을 나가자 시를 읽던 이노우에가 시선만 들어 아카시를 본다.




"말 안했나봐"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노우에도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다시 시선을 내린다. '나도 화장실' 아카시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혼자 남은 이노우에는 입술을 꾹 물었다.


볼 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화장실 문이 열린다. 거울로 흘긋보니 아카시이다. 후리하타는 어찌해야할지 몰라 이미 비누거품이 다 씻겨 내려 갔음에도 쏟아지는 물에 손을 문질렀다. 아카시는 후리하타의 옆에 서더니 렌즈를 빼낸다. 렌즈? 렌즈를 뺀 아카시의 왼쪽 눈은 노란빛이었다.




"손. 언제까지 씻을거야?"


"응? 아, 으응"




물을 끄고 손에 있는 물기를 털어내자 아카시가 손수건을 건넨다. 여기. 고마워. 후리하타는 손수건으로 물기를 꼼꼼히 닦으며 곁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기존의 렌즈를 버리더니 렌즈통에서 새로운 렌즈를 꺼내 끼운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감정 조절을 잘하게 되어 남 앞에서 노란색 눈동자가 바뀌는 일이 없어졌다. 그런 그가 렌즈로 눈동자의 색을 가려야한다. 후리하타는 생각보다 아카시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제 더이상 물기가 느껴지지않는 손에 손수건을 다시 원래의 형태로 갠다.




"여기 손수건. 잘썼어"




렌즈통을 정리한 아카시가 손을 뻗는다. 후리하타는 몇일전의 눈물을 흘리던 아카시가 떠올라 고개를 숙인다. 아카시의 손수건만 바라보고 있는데 다가온 그의 손이 손수건이 아닌 후리하타의 팔을 잡는다. 갑자기 몸이 앞으로 당겨지고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다. 후리하타가 당황한 사이 아카시가 혀를 집어넣어 깊게 입을 맞춘다. 키스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술을 떼는데 아카시가 아쉬운듯 후리하타의 입술에 다시 짧게 버드키스를 한다.




"좋아해, 코우키"




그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아카시가 화장실 밖을 나간다. 후리하타는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DA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