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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키, 이번 주말에 뭐해?"




후리하타가 이노우에를 올려다보았다. 고민하는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생간난듯 손뼉을 친다. 세이랑 과제하기로 했어. 주말 내내? 글쎄, 언제 끝날지 몰라서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또 할지도. 이노우에가 약하게 인상을 쓴다. 아아- 이게 친구에게 애인 뺏기는 기분이구나. 후리하타가 웃는다.




"내가 마야 많이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렇지"




그럼 이따봐! 강의실을 나가는 이노우에에게 후리하타가 손을 흔든다. 이노우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후리하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후리하타는 얼마전 교수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객관적으로 봐도 성적이 많이 내려갔다는 것. 중간고사 성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3년 성적 중 가장 낮은 성적이었다. 그나마 중간고사 때 잘 본걸로 어느정도 보완은 돼 그렇게 밑바닥은 아니었지만 후리하타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 교수에게서 꽤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말고사 시험을 망친건 아카시 때문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이노우에 때문이었다. 후리하타는 가방을 챙겨들었다.


1학기 때 이노우에와 막 사귈때만해도 성적을 유지하는 것보다 이노우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이노우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후리하타는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정말로 마야를 좋아하는걸까?




"뭐하냐?"




어깨를 툭 쳐오는 손길에 고개를 돌린다. 아오미네가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복도 한가운데 서있어? 후리하타는 그제서야 자신이 걸음을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엉망이네. 후리하타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생각할게 있어서. 생각은 앉아서 해, 복도에서 길 막지 말고. 아오미네가 시원스럽게 웃더니 후리하타의 머리를 헤집는다. 그럼 또 보자! 후리하타는 손을 한번 흔들고는 다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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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심 끝이 종이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얀 종이의 끝에 약간 흘려쓴듯한 글씨가 생겨난다. 후리하타는 멍하니 그 검은 글자가 흰 종이에서 태어나는 과정을 바라보았다. 한참 레포트에 쓸 내용을 정리하고 있던 아카시는 정신을 놓고있는 후리하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과제하기 싫으면 집에 가던가"


"으으- 싫은 건 아닌데"




정신을 차린 후리하타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이내 벌렁 누워버린다. 요즘 집중이 안된다. 수업도, 과제도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는 후리하타를 보고는 아카시가 펜을 내려놓는다. 조금 쉬었다 하자. 후리하타는 침대에 등을 기대는 아카시를 흘긋 보았다. 2학기 들어서 아카시의 스킨십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몇일전 모텔에서 그 일이 있는 후에는 친구끼리 할만한 스킨십도 줄었다. 이상하게 후리하타는 애가 탔다. 세이는 더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걸까. 아카시의 마음이 떠났다고 생각하자 불안해졌다. 후리하타는 몸을 일으켜 아카시에게로 다가갔다. 침대에 기대어 책을 읽던 아카시는 후리하타가 다가오자 책을 덮는다. 아카시와 눈높이를 맞춘 후리하타가 아카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눈빛은 달라진게 없었다. 그러면 왜?




"세이"


"왜"


"이제 내가 질려?"




아카시의 미간이 잔뜩 좁아진다. 질린다니, 무슨소리야. 후리하타는 그에 대답할수가 없었다. 애인이 있는 마당에 왜 키스를 해주지 않느냐고 어떻게 물을수 있겠는가. 후리하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카시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후리하타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후리하타에게 일절 손 대지 않았다. 더이상 후리하타의 미움을 받고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후리하타에게 저런 질문을 들었다. 후리하타의 마음을 종잡을수가 없어 한숨을 쉰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모르겠는데. 너 지금 원래 친구였을 때보다 훨씬 멀리 있는 것 같아"


"너에게 더이상 원망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




후리하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언제 널 원망했다고 그래? 저번에 모텔에서. 그건 너가 사과해서 그런거야! 아카시의 눈이 커진다. '너가 사과하면 해도 된다고 허락한 내가 죄책가이 드니까, 그러니까...'




"코우키"


"응?"


"키스, 해도 돼?"


"...응"




아카시가 떨리는 손으로 후리하타의 뺨을 감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머금는다. 왠지 모르게 후리하타는 서글퍼져 뺨을 감싼 아카시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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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게 손가락 끝을 바라보고 있는데 노란 단풍잎이 테이블에 툭 떨어진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카시가 단풍잎을 집어든다. 이제 낙엽이 질 때가 되었나. 아카시는 구름 한점 없는 가을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엔 음주가무지' 문득 떠오른 그 생각에 아카시가 낮게 웃었다. 후리하타와의 관계는 단풍잎이 색을 바꾸듯 바뀌었다. 이제 더이상 억지로 키스하는 것도, 함부로 손을 대는 것도 하지 않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서로가 내킬 때 입을 맞추고 심지어는 패팅까지 했다. 하지만 후리하타는 여전히 이노우에와 연애중이었고 자신에게 한번도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의 말 조차 없었다.


코우키는 나의 몸만 좋아하는게 아닐까. 다정하게 키스를 퍼붓는 나의 입술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나의 손길만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와 친구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하나. 하루에도 수십번 두사람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꼈다. 후리하타가 원망스러운건 아니었다. 그저 이 어중간한 관계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관계이기에 후리하타가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걸지도 몰랐다. 하루에도 몇번씩 이렇게 바닥까지 추락했다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다시 일어선다.


사실 자신은 이 관계에서 그 무엇도 할수없었다. 주도권은 후리하타가 쥐고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설령 자신에게 있다해도 그가 먼저 움직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할게 뻔했다. 절대 먼저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었다. 불완전하더라도 힘들게 만들어낸 관계였다. 아카시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내가 어쩌면 좋을까, 코우키. 넌 날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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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오늘 시험 끝?!


"응. 넌?"


"난 하나 더 남았어. 일부러 늦잠자려고 오후강의 위주로 신청했더니 시험 때 불편하네"




후리하타가 웃는다. 시험 잘봐, 하야마. 응, 잘가. 후리하타가 시계를 확인한다. 집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대라 도서관에서 공부할까 싶었지만 사람이 많을게 뻔해 관둔다. 역시 집에 갈까. 후리하타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린다. '시험 남았어?' 조금 기다리자 금방 답장이 온다.




[하나. 왜?]


[같이 집에 가려했는데 됐어. 혼자갈께]


[그래, 조심히 들어가]




화면을 바라본다. 남들이보면 무뚝뚝한 말투같이 보이겠지만 오랫동안 아카시와 같이 지내온 후리하타로서는 이게 얼마나 애정 어린 말투인지를 안다. 세이는 정말 날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후리하타는 작게 웃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진동한다. 아카시인가 싶어 화면을 확인해보니 이노우에다. 시험기간이라 바빠서 한동안 잊고 있던 존재였다.




[코우키 할말있는데 어디야?]




후리하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범대와 경상대 사이의 애매한 위치였다. 뭐라고 설명하지? 후리하타는 조금 고민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사범대 뒤편에 위치해있는 휴식공간으로 가면 말하기도 쉽고, 찾아오기도 쉽겠지. 후리하타는 짧게 답장을 했다. 사범대 건물에서도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단풍나무에서 붉은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단풍이 떨어지네. 후리하타는 다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할말이라는게 뭘까. 사실 지금 이노우에의 얼굴을 보는 건 부담스러웠다. 죄책감이라는 걸까. 따지고보면 자신은 바람을 피고 있었다. 그게 남자인게 조금 특이했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아무 문제 없을텐데 '돌아온다'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돌아간다면 역시나 아카시쪽이 아닐까. 자신의 제자리가 아카시의 옆인지 이노우에의 옆인지 헷갈렸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몰랐다. 이노우에가 좋은걸까? 아카시는? 좋아하는 것이 어떤 느낌으로 좋음이지? 이노우에와 계속 사귀고 싶다? 아카시와 사귀고 싶다?


후리하타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남자와의 연애.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은 여자를 좋아했다. 근데 지금은? 아카시는 모르는새에 후리하타의 '연애'라는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와있었다. 후리하타는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꿉친구,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전부 같은 곳.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 없어서는 안될 존재. 친구라는 관계보다는 반쪽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리는. 현재 아카시와는 어떤 관계인가?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는 관계. 왜 그런 관계인거야? 내가 아카시를 밀어내지 않아서. 왜 밀어내지 않아? 마야에 대한 우월감. 지금도? 아니. 그럼? 아. 


뭐 때문에 스스로 매달리면서까지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거야?

불안하니까.

뭐가?

내 곁을 떠날까봐.

떠나면 안돼?

응. 안돼.

왜?

내 반쪽이니까.

그 말이 좋아한다는 말 아니야?

아니야!

아니면 뭔데?

...뭐지?


나는 왜 아카시를 필요로 하지? 난 왜 아카시를 받아주는거지? 왜 이 관계를 유지하는거지? 왜 반쪽인거지? 왜, 왜, 왜, 왜?




"코우키"


"으..응?!"




넋을 놓고있던 후리하타가 고개를 든다. 눈 앞에는 이노우에가 묘한 표정으로 후리하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짓고있어? 후리하타는 그 질문에 멋쩍게 웃었다. 그냥 어제봤던 공포영화가 생각나서. 대충 얼버무린 말인데 이노우에는 넘어간다. 이노우에가 후리하타의 옆에 앉는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이노우에가 입을 연다.




"있지"


"응"


"우리 헤어지자"




두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스쳐지나간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방금 분 바람에 나뭇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진다. 후리하타는 '왜'라는 질문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이유야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직접 그 목소리로 듣게 된다면 알고있던 사실이라해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해도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왜냐고 안 물어봐?' 이노우에의 물음에 더더욱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 후리하타를 보던 이노우에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잇는다. 말하지마, 말하지 말아줘. 알고있으니까. 제발.




"나 아카시 좋아해. 사실 아카시 때문에 너랑 사귄거야"


"..."


"아카시에게 먼저 들켰었어. 그 때 너랑 헤어지려고 했는데, 문득 생각해보니까 너나 나나 짝사랑하고 있는

거잖아. 그게 너무 측은한거야. 동정? 연민? 뭐, 그런거. 그래서 계속 사귀려고 했는데 이제 더이상 안되겠다"




미안.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는 이노우에의 등은 조금 후련해보였다. 후리하타는 벤치에 등을 기대었다. 동정, 연민. 갑자기 그 두 단어의 뜻이 생각나지 않아 핸드폰을 꺼내 사전을 클릭한다. 

 동정. 명사. 남의 어려운 처지를 제 일처럼 여겨 딱하고 가엾은 마음을 가짐. 혹은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여 도움을 베풂.

 연민. 동사. 가엷어함.

제 일처럼 여겨, 도움을 베풂, 가엾어함. 후리하타는 핸드폰 화면에 적혀있는 문장을 눈도 깜빡이지 않아 바라보았다. 

 이노우에의 감정. 명사. 제 일처럼 여겨 가여운 마음에 도움을 베풂.


순간 아카시가 처음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순식간에 후리하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후리하타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동정. 그 때 후리하타는 이노우에의 진심을 알았고 마음을 부정당했다. 그 상황에서 아카시는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 


그래. 내가 세이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 세이가 날 필요로 한거야. 난 그걸 알아서 그를 도와준거야. 내가 먼저 다가간 것도 억지로 참는 아카시가 가여워서 그런거야. 나는 이노우에를 좋아했는데. 아카시가...


후리하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했던 결과가 이거였다. 단 한 단어로 해결될 것을 얼마나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던 것인가. 후리하타도 이노우에처럼 후련함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 일련의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건다.




"시험 끝났어?"


"응. 그냥 기다렸어"


"그쪽으로 갈께. 집에 같이 가자"


"저녁? 그래. 뭐먹을거야?"


"아무거나. 응, 갈께"




전화가 끊기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후리하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하늘에는 붉은 핏빛으로 노을이 펼쳐져있었다. 곧 해지겠네. 후리하타는 걸음을 옮겼다.


 나의 감정. 명사. 제 일처럼 여겨 가여운 마음에 도움을 베풂. 동의어. 동정.




Posted by DAJ :